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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by 존치즈버거

진수는 이로써 세 번째 휴학이었다. 한 번만 더 휴학을 하게 되면 교칙상 자동적으로 제적이 된다. 하지만 당장 돈이 필요했다. 물론 학교를 다니는 중에도 아르바이트는 끊임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전공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찼고 그는 시간을 쪼개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업을 들었지만 다른 생각에 몰두하는 일이 더 잦았다. 차라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이나 볼 걸, 하면서 말이다. 그때 조금 더 강력하게 부모님을 설득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도 함께. 부모님을 위해서 대학에 입학했지만 기쁨은 잠시, 그 이후의 생활도 그 외의 생활도 오롯이 진수의 몫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언제나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고 진수는 그런 부모님의 표정을 애써 외면하며 과장해서 웃는 일에 도가 터 있었다. 사실 그는 그런 일에 능숙하기도 했다. 가세가 갑자기 기운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판자촌에 살거나 부모님이 폐지를 주워야 할 만큼 극한의 가난은 아니었지만 발 뻗고 낙관하기에는 어딘가 계속해서 불안한 살림살이를 어릴 적부터 견디며 살았으니 말이다.


무언가가 콱 막힌 것처럼 해결되지 않는 삶의 응어리가 있었다. 진수와 부모님은 그런 면에서 동지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쾌한 덩어리를 함께 밀고 나가고 있다는 공감대가 진수를 버티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같이 밀다 보면 뚫리는 날이 있지 않을까. 바늘구멍 정도의 크기라 해도 그 틈새로 빛은 들어오기 마련이니까. 이것이 진수의 유일한 낙관이었다. 부모님과 진수의 골칫거리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동생이었다. 동생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동생은 지독하게 말을 안 듣는 놈이었다. 하도 주먹질을 해대는 통에 차라리 그걸 직업으로 삼으라고 복싱을 시켰지만 고2가 되자 동생은 슬럼프에 빠졌다. 그는 동생이 징징거릴 때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이라고 다독였다. 널 위해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지만 우선 동생을 믿어보기로 했다. 사실 슬럼프 따위 관심 없었다. 그는 그냥 동생이 가만히 있길 바랄 뿐이었다. 팍팍한 삶은 진수에게 생각을 잘하지 않는 버릇을 만들어 주었다. 생각이란 것을 해버리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허무하고 모조리 억울했다.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끝없이 돈에 쫓기는 인생. 사회는 항상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다루었지만 뉴스가 끝이 나면 문제들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동생과 농담을 주고받고 동생의 투정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넘겼지만 불안하긴 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을 해봤자 걱정만 느니까. 다만 동생이 슬럼프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밀 때의 불안감이 견딜 수 없었다. 그 단어를 빌미로 또 무슨 사고를 쳐버릴까 싶어서. 진수가 민섭의 제안을 수락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불안하니까 돈을 벌자.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리고 그다음을 생각하자. 생각을 먼저 하고 일이 터져버리면 손쓸 수가 없다.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민섭이었다.


-민섭이형.


-야야야.


-응, 형. 말해.


-내일부터 출근하냐?


-응, 형. 안 그래도 고맙다고 문자 넣으려고 했는데.


-새끼, 고마우면 술 사.


-히히히, 나중에 월급 타면.


-너 이 새끼 가서 잘해야 돼. 내 이름 팔아서 들어갔는데 문제 일으키고 그럼 진짜 죽는다.


-걱정 마.


-그래. 너야 뭐 말 잘 들으니까. 그래서 내가 특별히 추천해준 거 아니냐. 나한테 한 번이라도 개기고 그랬으면 얄짤없지 임마.


-내가 형한테 왜 개겨.


-야, 근데 있잖아.


그리고 민섭은 잠시 뜸 들였다. 칙칙, 하고 라이터 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박진수, 너 기억해.


-뭘?


-이거 진짜 중요한 이야기다.


진수는 자연스레 배에 힘을 주고 어깨를 폈다.


-응, 형 이야기해.


-너 거기 일하는 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


-왜?


-이게 좀 특수한 알바라서 그래.


-아, 그래?


진수는 민섭이 처음 알바를 제안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민섭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이렇게 경고 형식은 아니었다.


-이게 밖으로 발설되면 좀 문제가 생겨서.


-밖으로?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


-형, 이거 그냥 단순 사무직 아니었어?


-아, 그래, 그렇지. 근데 목소리가 왜 쫄았냐. 왜? 후달리냐?


-아니, 이거 나 같은 사람이 해도 되는 일 맞지?


-그럼 완전 너 적임자야.


그리고 민섭은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내뿜더니 다시 말했다.


-다른 게 아니고 이거 진짜 너니까 말해주는 건데, 이게 우리 쪽 간부가 연관이 되어있어서 그래. 원래 나랏밥 먹는 사람들 따로 영리 활동 같은 거 하면 안 되잖아. 그래서 대표가 다른 사람이긴 한데 사실 실질적 주인이 우리 쪽 꼰대거든. 솔직히 세상 돌아가는 게 다 이런 거 아니냐. 뭐 우리라고 거기 올라가면 안 그러겠냐? 신성하신 놈들 세계를 우리가 뭐 알겠어. 아무튼 그래서 이게 보수도 높고 일도 편한데 아무나 못하는 거야. 인맥 없음 면접 볼 기회 같은 것도 없고 그래. 고급 알바야. 알았어, 임마?


-진짜? 고마워, 형.


-그래, 그러니까 가서 실수 없이 윗사람들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해. 이거 진짜 아무나 소개해주고 그런 거 아닌데 진짜 너니까 특별히 내가 꽂아준 거니까.


-응, 형.


-암튼 이게 밖으로 이야기 나가면 문제가 복잡해지겠지?


-그렇겠네. 그런데 형, 걱정 마.


-믿는다. 이 새끼, 너 잘해. 편의점 알바 이런 거랑 완전 달라. 여긴 엄연한 회사야. 미리 사회 경험한다고 생각하고 돈 많이 벌고 임마, 돈 벌면 술 사고 입조심하고. 오케이?


-오케이!


민섭은 수화기에 대고 시원하게 가래 한 방을 뱉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입조심을 당부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진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알바 하나 더 늘린다는 생각이었지만 전화를 끊자 부담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상대가 민섭이라서 그런 점도 있을 것이었다. 민섭은 진수와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 자란 형으로 귀엽게 말해 골목대장이지 사실은 아이들의 우두머리 같은 존재였다. 진수도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 시쳇말로 따까리. 민섭과 진수의 권력관계는 단순히 형 동생 사이를 넘었다. 나이가 들어도 악순환은 계속되었지만 민섭이 경찰대를 가고 나서부터 공포에 대한 복종은 경외심으로 변했다. 진수는 민섭이 모욕감을 줄 때마다 자신에게 말했다. 사내들의 세계란 본래 짓궂은 장난과 의미 없는 농담들로 가득한 것이라고. 어설픈 자존심으로 놓치기엔 아까운 인맥이었다.








진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민섭과 통화 이후 자신이 맡은 일의 막중함 같은 것이 느껴져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잘 보여 휴학 기간 동안만이라도 회사에서 제대로 일해보고 싶었다. 조금 이른 시간 출발했지만 시위 때문인지 차가 막혔다. 진수는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진수는 빠르게 올라가는 미터기를 자꾸만 힐끔거렸다. 번잡한 대로를 빠져나오자 그제야 길이 뚫렸다. 택시 기사는 광화문 광장을 빠르게 고개 돌려 훑다가 낮게 욕을 내뱉었다. 높은 빌딩들 사이에 회색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진수는 두리번거리다 전화를 걸었다. 걸걸한 목소리의 중년 남자는 회색 건물로 들어오라 지시했다. 진수가 들어서자 경호원 두 명이 그를 훑었다. 이윽고 프런트 앞에서 경비가 진수를 불렀다. 이봐, 청년. 목소리가 단호하고 진중했다. 진수는 뻣뻣하게 언 채로 그 앞으로 갔다. 방금 전화한 사람과 다시 통화한 경비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13층으로 가시오. 진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었다. 문이 열리자 주머니에 손을 꽂고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기울인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자네가 박진수?


-네, 오늘부터 이곳에서 일하게 된 박진수입니다.


진수는 준비해 간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와 이력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봉투 안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대충 들어 알고 있어.


남자는 목에 걸린 카드키를 유리문 옆 센서에 댔다. 검은색으로 코팅된 유리문이 열리고 회사 사무실이 보였다. 진수가 생각한 회사와는 사뭇 달랐다. 가지런히 정렬된 책상과 업무 보는 사람들 대신 번호가 적힌 방이 눈에 들어왔다. 상당히 폐쇄적이군, 진수는 오히려 그 편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은 꽤 컸다. 양쪽으로 숫자가 적힌 문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어릴 적 영화에서 본 피아노 연습실을 연상케 했다. 문 앞에 숫자가 쓰여 있지 않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방을 착각할 것 같기도 했다.


공간의 소실점에 남자의 방이 있었다. 남자는 컴퓨터와 연결된 카메라 앞에 진수를 앉혔다. 사진 찍을 거요. 진수가 멍하게 카메라의 구멍을 찾는 사이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컴퓨터로 무언가를 기입하더니 그가 목에 걸고 있는 것 같은 카드키를 건넸다.


-이게 없으면 절대 여기 출입 못해. 누구보고 대신 열어 달라고 해서도 안 돼. 제발, 잊어버리지 말고 혹시라도 그런 불상사가 생기면 나한테 전화를 해.


진수는 카드키를 꼭 쥐었다.


-30번 방으로 가지.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훅하고 진수를 껴안았다. 불을 켜자 그 안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방안에는 커다란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두꺼운 철제 서류가 놓여있고 특이하게도 버튼 같은 것이 있었다. 버튼마다 색깔이 달랐다. 남자는 진수의 어깨를 잡고 의자에 앉혔다. 남자는 자신을 진수의 사수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름 대신 김반장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진수가 네, 김반장님, 하자 그는 아니, 김반장이라며 님을 붙이는 것은 너무 격식 차리는 것 같아 싫다고 손을 내저었다.


-일에 대해서는 들은 거 있어?


-모니터를 보는 일이라고만 들었습니다.


-그렇게만 말했다고?


김반장은 진수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꼿꼿하게 서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수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남자의 말을 경청했다. 따로 사내 교육 시간 같은 것은 없고 주 6일 근무이며 근무시간은 아침 9시에서 저녁 6시였다. 점심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그때는 반드시 모니터를 꺼야 했다. 핸드폰은 사용할 수 없고 만약 통화가 필요한 용무가 있을 시에는 사무실 밖의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이용해야 했다. 일의 특성상 작업이 다소 개인적이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일은 적어 따로 소개 같은 것은 필요 없지만 원한다면 휴식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말하는 도중 몇 장의 서류에 서명하게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일에 집중할 것. 회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발설하지 말 것.


모니터를 켰다. 화면은 흑백이었다. 그리고 미로가 있었다. 미로는 거대했다. 미로의 길목마다 숫자가 쓰여 있었다. 입구가 있는 왼쪽으로부터 출구가 있는 오른쪽까지 번호는 커졌다. 대략 30번까지의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진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김반장이 소매를 걷고 진수를 탁탁 쳤다. 일어나 봐. 의자에 앉은 남자가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는 타임워치가 떴다. 그리고 미로 입구로 희미하게 기체가 퍼지는 영상이 나왔다. 입구에 서 있던 사람이 몸을 움츠렸다. 소매로 입을 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상 안의 사람이 뛰기 시작했다. 김반장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했다. 집중과 순발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 이게 왼쪽으로 달리고 있지? 잘 봐, 왼쪽 모서리를 돌 거야. 그럼 그 앞에 3이라는 숫자 보이지? 저게 3번으로 가기 전에 먼저 이렇게 치라고.


그러면서 남자는 책상 위의 버튼을 눌렀다. 숫자 3이 써진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원형의 노란 버튼을 누르자 3번 구역에 칸막이가 생겼다. 영상 안의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막다른 골목에 당황한 듯 우왕좌왕했다. 입구에서부터 퍼진 불투명한 기체가 몸을 불려 서서히 그 사람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김반장은 빠른 동작으로 영상 속에 있는 사람의 탈출을 계속해서 저지했다. 노란색을 누르면 칸막이가 나왔고 주황색 버튼을 누르자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을 떨었다. 가스는 이제 미로를 모조리 뒤덮고 있었다. 사람의 움직임이 포착되긴 했지만 희미했다. 김반장은 뒤돌아 진수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이거 맥아리가 없네. 벌써 지쳤어. 이럴 때는 이렇게 파란색 버튼을 눌러서 길을 터주라고.


파란색 버튼을 누르자 미로의 바닥이 움직였다. 화면 안의 사람이 떠밀리듯 출구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출구에 다다르진 않았다. 딱 거기까지, 미로 위의 출구 쪽에서 조명이 켜졌다. 비상구 탈출 표시였다. 그것을 본 사람은 가까스로 일어나 다시 출구를 찾기 위해 달렸다. 그리고 또다시 장애물의 연속, 미끄러짐, 분투. 화면 속의 사람이 출구에 다다르자 김반장이 보라색 버튼을 눌렀다. 비상구 하나가 더 켜졌다. 문은 두 개였다. 출구에 선 사람은 그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다. 사람은 서성거렸다.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문 하나를 선택해 밀고 나갔다. 타임워치가 멈추고 모니터에서 숫자가 떴다. 점수였다. 김반장은 생각보다 점수가 높지 않다고 씁쓸하게 내뱉었다. 빠른 시간 안에 그들이 탈출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중간에 그들이 서성이거나 멈추는 것은 점수를 낮게 만든다고 했다. 그들이 생각할 틈 없이 본능대로 움직이는 게 ‘제일 좋은 게임 내용’이라고 덧붙이며. 진수는 출구로 나간 사람이 궁금해졌다.


-저 출구는 두 개가 다른 건가요?


김반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똑같아. 어디를 가도 다시 미로지. 뭐 미로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해. 신참인 자네는 미로만 맡아. 조금 더 숙련이 되면 다른 게임들이 기다리고 있지.


-게임이요?


-그래. 게임. 일종의 탈출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돼.


진수는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질문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지 망설였다.


-자네가 할 일은 이거야. 오늘은 처음이니 내 입회 아래 진행하도록 하지. 배울 게 많을 거야. 간단한 아케이드 게임 같지만 사실은 머리를 써야 하는 전략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돼. 상대가 먼저 머리를 쓰기 전에 네가 먼저 그를 막아야 해.


-네. 어렵네요.


-너무 부담 가지지 마. 그냥 게임 같은 거니까. 물론 잦은 실수는 해롭겠지. 하지만 집중해서 하다 보면 룰을 알게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자신 있나?


진수는 얼떨결에 힘을 주어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확실히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 혼란스럽겠지. 뭐하는 회사인가 싶겠고. 간단하게 말하면 여긴 임상실험을 하는 곳이야. 설계된 실험을 하청 받아 진행하는 곳이지. 생소하겠지만 이런 직업도 있어. 그런데 이게 말이야, 굉장히 중요한 프로젝트라 외부에 발설이 되면 안 된다고.


-실험이라면…… 제가 이과가 아니고 문과 출신이거든요. 경영학과 다니는데 괜찮을까요?


김반장이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너그러운 미소였다. 그리고는 잔뜩 긴장해 움츠린 진수의 어깨를 꽉 잡았다. 진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수는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남자의 기세에 눌려 뭐라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김반장은 진수를 잡고 있던 손에 내려놓고 다시 그 미소를 없애고 이야기를 했다. 국가가 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들을 초빙해 무려 900억 원이라는 예산을 투자해 고안한 행동교정 프로그램인데 이 회사에서는 그것을 교정이 필요한 반사회적 인물들을 상대로 임상실험 중이라고. 이 실험이 가지고 올 파장과 보안을 우려해 엄선된 사람들만을 선발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곳은 국가가 지정한 하청업체 같은 곳이었다. 물론 비공식이었다. 진수는 비록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학생 신분이었지만 익히 성실하고 착하고 바르며 동시에 집안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 경찰대 수석 길민섭 학생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니 영광과 동시에 책임감 또한 사명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작업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김반장은 진수의 사수로서 특별히 회사의 기밀 사항을 전달하는 것이니 이 사실에도 책임감을 느끼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장장 3시간 정도 더 화면을 보며 설명을 반복했다. 진수는 첫날이니 만큼 잔뜩 긴장해 실수를 연발했다. 그러나 김반장은 다그치지 않고 조용히 진수를 지켜봐 주었다.


-이렇게만 하면 된다고. 그러니까 이제 이 일의 목표를 알겠나?


-목표. 저 사람들을 정상이 되게 만드는 것 아닌가요?


진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았어. 하지만 그건 좀 더 나중의 문제고 일단 저들이 미로를 탈출하게 만드는 거야.


-탈출이요?


-그래, 이건 탈출을 못하게 막는 게 아니라 탈출을 하도록 유도하는 거야. 다만 그 과정이 너무 수월해선 안 돼. 그럼 저들은 우리를 얕잡아 볼 거라고.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이 게임을 포기하게 해서도 안 돼. 그럴 땐 살살 다독여 주라고. 그래서 저들로 하여금 탈주에 성공했다고 믿게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영원히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해.


진수는 저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남자가 그의 등을 툭툭 쳤다. 진수는 김반장의 손길이 무섭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게임이 출시되기 전에 미리 실행해보는 베타테스터라고 보면 돼. 다만 게임의 승률이 높아질수록 인센티브가 지급이 된다는 점이 이곳의 장점이지만.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 있었던 일을 발설하는 순간 사법조치가 들어갈 거야. 굉장히 중요한 문제야. 명심하라고.


김반장은 책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오늘 모니터 속에 나타난 인물과 앞으로 맡게 될 사람들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이라고 했다. 김반장은 그들을 피실험체라고 불렀다. 피실험체들의 기록을 본 순간 진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들은 대통령 가족을 향해 주술적 살해 협박을 일삼았고 도로를 강제로 점거하고 기물을 파손하거나 경찰 심지어는 지나가는 시민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하기도 했다. 또한 소아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난교파티를 도모하거나 알 수 없는 단체를 만들어 예산을 횡령해 이웃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친 사람도 있었다.










-이것들이 바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나하나 사명감을 가지고 버튼을 누르도록 해. 아까 무슨 과라고 그랬지?


-경영학과요.


-경영학 좋지. 그래, 여기서 열심히 일해. 다 경험이 될 거야. 경험이.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면서 말했다.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게임한다고 생각해. 눈치게임 같은 거야. 상대가 먼저 공격하기 전에 네가 먼저 공격해.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조금 있다 휴식시간이야. 방송이 나오면 휴식실로 와.


진수는 떨리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 벌어지는 일은 모두 진수의 책임이었다. 그는 모니터를 파고들 것처럼 쳐다보았다. 초록 버튼을 누르고 게임을 시작했다. 진수는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확신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차례차례 버튼을 눌렀다. 남자가 지켜보지 않아서인지 아까보다 게임을 풀어가기가 쉬웠다. 세 번 정도 게임을 더 해보자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눈이 피로했지만 편의점이나 술집에서 일할 때보다는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 봉급을 생각하자 다른 의문들은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수는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휴식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방안을 울렸다. 모니터는 저절로 꺼졌다. 휴식시간에는 무조건 휴식실로 가야 했다. 경쾌한 안내방송을 들으며 진수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눈이 퀭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방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진수는 그들을 따라갔다. 휴식실은 김반장의 사무실이 위치한 공간의 제일 안쪽의 왼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나왔다. 계단은 한 명이 올라가기에나 충분한 크기였다. 그곳은 소극장만한 크기였다. 그리고 정말 극장 같았다. 의자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방 번호에 맞게 앉으면 됐다. 그리고 맨 앞에는 스크린이 있었다. 사람들은 눈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별다른 대화 없이 자기 자리에 앉았다. 진수는 자신을 소개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모두가 착석하자 이내 불이 꺼졌고 스크린에서 아름다운 풍광이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풍광을 넋을 놓고 바라보자 이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말 좋은 회사인 것 같아, 하길 잘했어, 진수는 이런 생각을 하다 이내 스르르 잠에 들었다.


-끝났어요. 일어나세요.


누군가 진수를 깨웠다. 진수는 얼마나 잤는지 하루가 지났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거의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 앞에 작은 여자가 서 있었다. 이제 돌아가 일해야 하는 시간이라고 여자가 말했다. 진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피로가 모두 풀린 기분이었다. 진수는 감사 인사를 하려 했지만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휴식실을 빠져나갔다. 진수도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남자가 이미 그의 방에 와있었다. 진수는 급하게 의자에 앉으며 또 한 번 죄송하다고 말했다. 남자는 말없이 초록 버튼을 눌렀고 느닷없이 시작한 게임에 진수의 손에서 땀이 흘렀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점수가 올라갔지만 만족할 수준은 아닌 듯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자, 진수는 다짐했다. 6시가 되자 모니터가 저절로 꺼졌다. 남자는 진수에게 악수를 청하며 기대하겠노라 말했다. 진수는 회사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냐고 물었다. 남자는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거라고 말했다. 진수는 그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딱 내 이상형이었는데, 하면서 진수는 조금 아쉬워했지만 지금은 연애할 시기가 아니었다. 진수는 가끔 버스정류장에서 여자와 마주쳤다. 그러나 여자는 눈인사도 하지 않고 고개 돌리며 그를 아예 모른 척했다.








진수는 일에 잘 적응해갔다. 다만 자신이 맡고 있던 피실험체 하나가 문제였다. 그 피실험체는 다른 실험체들과 달리 강도 높은 트랩을 설치해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막다른 골목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파괴하려 한다든가 뛰어넘으려 시도하기도 했고 출구의 문을 발로 차 부수기도 했다. 피실험체를 통제하는 것은 진수의 몫이었고 이는 고스란히 진수의 점수에 영향을 주었다. 진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머리를 굴렸지만 피실험체에게 도리어 역전패당하기 일쑤였다. 진수는 김반장을 찾아갔다. 그는 진수를 나무라면서도 깊게 고민하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빨간 버튼을 사용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슬쩍 진수의 눈치를 봤다. 진수도 그를 따라 눈알을 굴렸다. 혹시 방안에 CCTV 같은 것이 있는 걸까. 김반장은 진수 쪽으로 몸을 바짝 숙이더니 말했다.


-사실 빨간 버튼은 아주 긴급할 때 사용하는 거긴 한데 말이야. 통제가 안 된다니 그 버튼을 사용할 수밖에 없겠어.


그러면서 남자는 그 빨간 버튼에 대해 이야기했다. 빨간 버튼을 누른다는 것은 일종의 실험 실패를 인정하는 일이라고. 물론 기계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한 예측이란 불가능하지만 900억의 예산이 들어간 연구의 목적이 실패를 인정하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말과 함께. 진수는 넌지시 빨간 버튼을 누르는 것이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반장은 무언가 깊게 생각하더니 자신이 책임을 질 테니 빨간 버튼을 누르라고 했다. 빨간 버튼의 다른 이름은 KILL. 다소 섬뜩한 별칭이었지만 피실험자를 상대로 게임을 완전히 종료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실패에 대한 데이터가 많이 쌓이면 회사 입장에서는 썩 좋은 일이 아니니 항상 신중을 기하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김반장은 진수가 빨간 버튼을 누르길 바라듯 애매한 사족을 끊임없이 달았다.


-아, 그런데 실험을 종료하면 피실험체는 어떻게 되는 거죠?


-응, 영원히 교정받지 못하는 거지.


-그렇다면 피실험체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되는 거네요.


-그렇지만 이 실험의 완벽성을 테스트하는 거니까 뭐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열리겠지. 거기까진 생각하지 마. 우리는 그저 하달받은 업무를 열심히 해나간다는 그 사실만 중요한 거야. 그런 건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는 일이잖아.


진수는 꾸벅 인사를 하고 김반장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제의 피실험체를 상대로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피실험체는 장애에 굴하지 않고 미친 듯이 출구를 찾았다. 아니 출구를 찾는 보다는 이 미로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 목적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렇게나 가는 것 같으면서도 절대 갔던 길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다. 진수는 어차피 빨간 버튼을 누르기로 결심한 이상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하지 않고 피실험체를 관찰하기로 했다. 그 실험체는 아주 지독한 인간이었다. 기록에 쓰여 있는 대로라면 흉악범 중에 흉악범이었다. 저런 인간을 사회에서 마주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읊조렸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동생이 떠오르기도 했다. 부모님은 그래도 동생이 마음을 다잡고 운동에 매진 중이지만 코치의 부당한 대우에 작은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알려주었다. 진수는 동생의 날카로움을 진즉에 잠재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을 모니터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피실험체가 무언가 외치기 시작했다. 화면은 영상만을 송출할 뿐 음향은 제거했기에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 진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우 처절하고 슬퍼 보였다. 진수의 마음이 약해지려는 찰나 피실험체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진수는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아 오싹해졌다. 냉기 같은 것이 감돌았고 오랜 시선을 거둔 피실험체가 갑자기 진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진수는 모니터를 찢고 그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들어 급하게 빨간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순간 까맣게 변했다. 그리고 종료라는 단어가 화면을 메웠다. 다시 미로가 나왔을 때는 이미 피실험체는 없어지고 난 후였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진수는 실험체의 살기 어린 눈빛이 자기 몸에 달라붙은 것 같아 괜히 손으로 팔을 매만졌다.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은 아마도 피실험체들이 살아 있는 인간임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진수는 아무래도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많은 생각은 해로우니까. 휴식시간이 왔고 진수는 능숙하게 눈인사를 나누고 스크린의 풍광에 몸을 실었다. 마음이 다시 평온해졌다. 김반장에게 피실험체의 종료를 보고 하자 슬쩍 미소가 띠는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다.









복학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수는 일이 만족스러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 빨간 버튼을 누르는 일도 잦았다. 김반장은 자주 그에게 빨간 버튼 누르는 일을 권장했다. 그만큼 피실험자들이 다루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민섭은 수석 졸업을 앞두고 의무복무 대신 로스쿨에 진학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에 따른 수 천만 원의 반환금은 어느 후원자가 대신 내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진수는 종종 그에게 연락했지만 민섭은 항상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어느 날인가 전화를 거니 더 이상 없는 번호였다. 그즈음 김반장은 진수를 따로 불렀다. 장기 출장을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로 보고 하라고 했지만 그럴 일은 아무래도 없을 것 같았다. 진수는 김반장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일의 숙련도가 꽤 높아졌다. 잘만 하면 승진하고 다른 게임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자퇴를 고민하기도 했다. 김반장은 진수에게 며칠의 휴가를 주었다. 진수는 고향집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 사람들의 숫자가 전보다 줄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폐쇄적인 공간이긴 했지만 출퇴근 시간에는 다소 붐볐던 공간이 헐렁해진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진수가 마음에 들어 한 여자가 요즘 들어 통 보이지 않았다. 진수는 에둘러 회사 전반 분위기에 대해 김반장에게 물었지만 그는 시스템에 너무 호기심을 가지지 말라 충고를 했다. 그래, 아직은 그냥 알바 나부랭이니까. 진수는 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수가 내려가자 부모님은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무언가 강아지 오줌 마려운 표정을 내내 짓고 있었다. 이것은 보모님이 평소에 내보이던 죄책감을 동반한 안쓰러움과는 달랐다. 덩달아 불안해진 진수는 부모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속이 안 좋아? 밥이 별로야? 동생이 또 사고 쳤어? 한참 망설이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뭐 잘못했냐? 진수는 당황하는 것 말고는 달리 보일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는 한참 고민 끝에 유명한 방송국 탐사 프로그램에서 진수를 취재하러 왔었다는 사실을 말했다. 진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모로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무슨 고문 용역회사 어쩌고 그러던데, 하고 엄마가 말하자 진수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문? 용역?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진짜 나 찾아온 게 맞아? 하며 연신 질문했다. 부모님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그들을 쫓아 보내기에 바빴고 일하는 진수에게 해가 될까 쉬쉬했다는 것이다. 진수는 입이 탔다.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혹시 나쁜 짓 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하고 물었고 진수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는 시늉을 하며 부모님을 달랬다. 착오라는 말을 하면서도 위안이 안 됐다. 분명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진수는 그날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고문을 용역 하다니, 세상에 그런 게 말이 돼? 그러다 잠이 들었는데 진수는 빨간 버튼을 처음으로 누르던 날에 대한 꿈을 꾸었다. 잊히지 않던 그 눈빛이 점점 진수에게 다가오는 꿈. 다음 날 아침 집으로 두 명의 사내가 찾아왔다. 부모님이 말한 그 PD들이었다. 진수의 멀뚱한 표정을 한참 보더니 그들은 자신들의 이마를 쳤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니까 진수가 신의 직장이라 믿고 있던 그 회사의 실체에 대해, 용기 있는 내부고발자의 양심선언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아무도 몰랐을 끔찍한 비밀에 대해 말해주었다.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서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국가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잡아들여 감금을 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악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을 고용해 고문까지 한다는 일이 가능할까. 게다가 거기에 어마어마한 예산을 쏟아붓고는 문서를 위조했다는 것이 있을 수나 있는 일일까. 그러나 PD들의 너무나 그럴듯한 설명에 진수는 확실히 일이 잘못됐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초기 진행단계이지만 거기에 연루된 수많은 고위 관계자들의 비리만 해도 아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악행들에 대한 심도 있는 고발이 진행될 거라고 했다. 진수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앉아 있었다. 두 사내의 눈빛이 당신은 정말 무고한 사람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진수는 당연히 아무것도 몰랐고 그러면서도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발설하면 사법조치, 그러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진수는 그들의 공범이었다. 왜 나를 취조하듯이, 젠장, 이러는 저의가 뭡니까, 저는 그냥 성실히 일하는 학생입니다. 나가세요. 그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두 사내가 쓸쓸한 뒷모습으로 갔다. 문틈에 자신들의 명함을 슬쩍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말했다.


-저희도 무모한 싸움인 줄 압니다. 그런데 이거 너무 심하잖아요. 두려우시겠지만 용기를 내주세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보호해드리겠습니다. 제발, 무고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용기를 내주세요.


진수는 그들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부모님을 안심시킨 다음 서둘러 서울로 돌아갔다.







진수는 회사 엘리베이터에 내리며 자신이 카드키를 놓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는 수없이 김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오래도록 신호음만 토해냈다. 포기하던 찰나 김반장이 전화를 받았다. 진수는 카드키를 놓고 왔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출장 중이시니 어디에 말해야 하나요, 하고 묻는데 맞은편 유리문 안에서 김반장이 나왔다. 김반장은 일이 빨리 끝났다고 먼저 말했다. 진수는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진수도 달리 부모님 댁에서 할 일이 없어 먼저 올라왔다고 말했다. 김반장은 별다른 질문이 없었다. 진수는 나름 최선을 다해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모든 방은 여전히 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만 어쩐지 휑한 느낌이었다. 진수는 능청스럽게 김반장에게 인사하고 자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원래 휴가잖아. 오늘은 쉬엄쉬엄해.


진수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았다. 모니터 앞에 앉았다. 모니터를 켰다. 진수는 조용히 초록버튼을 눌러 게임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빨간 버튼을 눌렀다. 다음 실험체에게도 그다음 실험체에게도 빨간 버튼을 눌렀다. 진수는 최대한 신속하고 조심스럽게 그 작업들을 수행했다. 진수는 두려웠다. 자신이 가담한 일의 실체가 궁금하면서도 또한 진실을 알고 난 후가 두려웠다. 진수는 어쩌면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어디서 나온 용기였는지 진수는 인생 최초의 불끈거리는 정의감으로 빨간 버튼을 눌렀다. 이 실험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게 대해 깊이 고민하기엔 여유가 부족했다. 진수는 지금 자신이 변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죄 같았다. 계속해서 빨간 버튼을 누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순간 오한이 든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지고 땀이 흐르고 털이 쭈뼛 섰다. 진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 웃고 있는 김반장이 보였다. 김반장과 눈이 마주쳤다. 김반장은 손을 들어 느리게 박수를 쳤다. 진수는 모니터 속에 등장한 마지막 사람을 위해 가까스로 빨간 버튼을 눌렀다. 이상하게도 김반장은 저지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진수를 지켜볼 뿐이었다. 진수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싶어 졌지만 꾹 참았다. 목이 아려왔다. 진수는 그런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김반장이 서서히 다가왔다. 진수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기도하듯 말했다. 마치 자기 아들의 머리를 만지듯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괜찮아, 곧 잠잠해질 거야. 별 거 아니야. 그리고 일이 잠잠해지면 그건 다 경험이 될 거야. 어디 가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지. 넌 최선을 다한 거야.


김반장은 진수를 데리고 휴식실로 갔다. 텅 빈 휴식실에 진수 홀로 의자에 앉았다. 곧 스크린이 켜졌다. 진수는 풍광을 바라보며 꼼짝 할 수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서서히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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