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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Nov 02. 2023

내가 사랑이라 부르는 몸뚱어리

열세 번째

   

 20대 초반 혼자 자취를 하던 때 나는 파스를 붙이다가 울었던 적이 있다. 10대 시절에도 등 근육이 아파 자주 통증의학과에 들러 근육 주사를 맞곤 했었다. 움츠리는 습관을 고치려 스트레칭을 꾸준히 한 덕에 그때만큼 등이 아팠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목에서부터 등허리 아랫부분까지 누군가 발로 차는 것처럼 아파 오곤 했다. 그날도 아마 그랬을 거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다짜고짜 등을 내보이며 파스 좀 붙여달라고 말할 만큼 나는 넉살이 좋지 않았다. 파스를 사 들고 집으로 와 고민에 빠졌다. 팔이나 다리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붙일 수 있지만 등은 정말 애매한 위치에 있으니까. 그때 운동을 좋아하던 친구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혼자 등에 파스를 붙일 땐 침대에 파스를 이렇게 놓이고 위치를 맞춰서 그 위에 누우면 돼.” 나는 그 말대로 했다. 그리고 등을 만져보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파스의 표면이 쭈글쭈글한 것이었다. 제대로 붙지 않아 사이가 울어 나 울퉁불퉁해진 파스를 떼어내려 다시 갖은 애를 써야 했다. 당시 내 침대 옆에는 기다린 전신 거울이 있었는데 혼자 그 짓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비치자 서러움이 더 커졌고 그만큼 내 울음도 커졌다. 하긴 그땐 작은 일에도 잘 웃고 조그만 상처에도 눈물을 뚝뚝 흘리던 날의 연속이었으니까. 어쩌면 혼자 살겠다는 굳은 결심은 그때 이미 무너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제일 좋은 건 발이 아프다고 하면 발을 주물러 주고 혼자 허리를 톡톡 두드리면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허리를 주물러주는 짝이 생겼다는 점이다. 등에 파스를 붙이는 건 일도 아니다. 그 어떤 말도 필요 없다. 그저 파스를 들고 남편 앞으로 가 휑한 등짝을 보인 다음 위치를 말하면 되는 것이다. 파스는 들뜸 하나 없이 반들반들하게 나의 등에 안착한다. 사람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법, 나 또한 남편의 발과 다리를 주물러 주고 때론 전혀 짐작도 못한 곳에 한 가닥 삐죽 솟아오른 털을 뽑아낸다던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생긴 뾰루지를 짜내고 연고를 발라준다. 피를 무서워하고 상처를 보는 일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나는 가끔 어딘가에 손이 베이면 눈을 질끈 감은 채 남편에게 다가가 상처의 정도를 물어보기도 한다. 그럴 때 남편은 나 대신 나의 눈이 되어 상처를 관찰한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정말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생긴 질환의 경우에도 의사보다 남편이 먼저 그것을 본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청춘의 나날을 지나 우리는 아무에게나 드러낼 수 없는 치부를 서슴없이 보여주며 상대가 가진 질병의 최초 목격자가 되었다. 너와 내가 만나 우리라는 하나의 가정을 이루기까지 모든 순간이 축제 같았다면, 신혼이라는 짧은 이벤트 뒤에는 다시 일상이 있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부지런히 생의 쳇바퀴를 돌리지만, 누추한 과정마저 다 지켜보는 게 결혼이었다. 생활이 우리의 몸에서 낭만을 앗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제왕절개를 끝낸 후였다. 마취에서 깨어나자 나는 트럭 한 대가 내 몸을 훑고 간 듯한 고통을 느꼈다. 침대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에 부친 나는 신생아실에 수유를 하러 가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3일 누워있는 동안 남편이 병간호를 했고 나는 고통 덕분에 수치심이라곤 1도 느끼지 못했다. 멋진 옷을 갖춰 입고 공들여 스스로를 꾸민 다음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그간 우리가 이룬 것들을 봐, 하면서 와인잔을 부딪히는 것만이 행복한 결혼 생활의 장면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갓 태어난 아이를 목욕시키는 일에 제일 많은 에너지를 쏟았는데 혹여라도 아이가 감기에 걸릴까 전전긍긍하며 보일러를 빵빵하게 튼 주방에서 간이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시켰다. 둘 다 손이 야무지지 못한 탓에 조그만 아기를 씻기는 일이 어찌나 어려운지 목욕을 끝내고 뽀송한 아이와 달리 우리 둘은 땀에 푹 절어 있었다. 어느 날부터 남편은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아이 목욕을 시키고 곧장 욕실로 가 샤워를 했다. 그 사이 마찬가지로 땀을 흘린 나는 축축하게 젖은 티셔츠를 반쯤만 걸친 채 멍하니 있다가 남편이 나오면 아이를 넘기고 바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타인이 내 삶에 들어오는 일은 그 몸뚱어리와 함께 오는 일, 감정이 부딪히는 일만큼이나 경계 없이 침범하는 타인의 몸과 몸. 내가 없으면 목청이 터져라 울던 아이의 영유아기 시절에는 샤워하는 도중에도 문을 벌컥 여는 일도 잦았다. 몸을 가리기는커녕 물기만 재빨리 닦은 채 아이를 안아 달래야 했으니까. 어느 날에는 강아지 패드를 갈다 느닷없이 허리 디스크가 터져 드러누워야 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속옷을 갈아입혀 달라는 부탁을 하는 내가 있었다. 연애할 때 보았던 근사한 서로의 모습은 사실상 누추하고 엉성한 과정이 모두 제거된 결과물일 뿐이었다는 걸 조금씩 배워나갔다. 조금 서글프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 볼품없는 우리가 서로에게 잘 보이려 그렇게나 애를 썼었다 싶어 서로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낭만이라고는 염라대왕 할아비가 와도 소생시킬 수 없는 몸뚱어리의 역사를 축적해 버렸지만 슬프지 않다. 우리는 언제고 젊을 수 없고 언젠가 우리 몸은 마음보다 더 나약해지기 마련이니까.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몸 또한 내 삶의 일부가 된다. 가치관, 성격, 취향, 목표와 태도만큼이나 상대의 몸의 변화 또한 내 일생을 변화시킨다. 나와 멀리 떨어진 나의 몸. 우리의 서약을 파기하지 않는 한 최후까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담긴 그릇이 바로 사랑하는 이의 몸이다. 낭만이 휘발된 서로의 몸을 긍정하고 끌어안기.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하나 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질릴 만큼 밑바닥을 보여준 다음 초라하고 쓸쓸한 것 위에 다시 사랑의 집을 짓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요즘 부쩍 실감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 인생에서 사랑이 끝날 날은 없을 것 같다. 아슴아슴 졸린 눈으로 기어코 손 내밀면 귀신같이 혈자리를 눌러주는 타인이 있다는 것, 이럴 땐 인생이 꼭 선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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