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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Nov 16. 2023

뭐라도 된다

열네 번째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난 걸까? 간절히 원하던 것들을 눈앞에 두고 보기 좋게 미끄러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나란 인간은 도대체 왜 태어나서 이토록 고된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실패는 우울감만큼이나 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를 만들어 나의 존재를 설명하든 그것은 오로지 나의 추측일 뿐이었다. 게다가 한낱 미물인 내 존재의 답안지를 대체 누가 공들여 만든단 말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생명의 탄생은 생식 활동에 의한 우연 아닌가?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와 나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내 탄생의 이유 따윈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변수와 우연 속에 나라는 인간이 탄생하였고 지금의 내가 된 것뿐, 애초에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삶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 무의미가 나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인생은 정말이지 아이러니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결론까지 얻었으니 그야말로 허무주의가 따로 없지만, 이상하게 나는 나 자신이 인정한 무(無)에서 엄청난 위안을 얻는다. 나는 실패하는 것과 잃는 것과 모자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허황된 착각 속에서 얼마나 허상을 보았던가. 사람들은 늘 행복을 말하고 긍정의 조각을 찾아다니지만 어쩌면 그런 갈급함이 되려 이 세상에 행복과 긍정이 희소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한 시대가 외치는 캐치프레이즈는 사실 그 시대에 제일 모자란 부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부와 명예 같은 것들을 내가 애초에 원하기나 했던 것일까. 언제까지 남과 비교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심지어 남과 비교하는 법 또한 타인의 강압 속에서 배운 것뿐 진짜 배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다 다르게 생길 수 있는 것일까. 눈과 코와 입이 있는 건 다 똑같은데 그 똑같은 구성 요소를 가지고도 저마다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이렇게 각자 가진 개성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들을 하고서 어떻게 이렇게나 비슷한 꿈을 꿀 수 있냐는 것이다. 비슷비슷한 꿈들, 비슷비슷한 푸념, 비슷비슷한 고민. 마치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비슷한 모습으로 인생을 말하는 건지. 30대에 들어서며 이런 현상은 극심해졌다. 따뜻하고 소박한 한 끼에 만족하면서도 끊임없이 소유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은 탐욕스럽다기보다는 기계적으로 보였다. 나는 덜컥 겁이 났고 이를 악물고 나만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차피 인생은 무의미하니까, 남들의 의견에 편승해 흘러가다 보면 정말이지 무의미로만 끝을 맺게 될지도 모르니까.    

  

 백지상태에서 다시 내 인생을 규정하기 시작했다. 태어나 자라고 자라는 동안 들었던, 진위여부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어른들의 말이기에 주워섬겼던 문장들을 내 안에서 다 지워버렸다. 나이와 지혜는 무관했다. 사유 없이 내뱉는 말들을 묵묵히 따르며 칭찬받고 싶은 나이는 지났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들,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내가 좋아하는 인간상이나 내가 언제 제일 편하다고 느끼는지 같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되짚어 보았다. 인간을 사랑하되 타인의 삶에 간섭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부족한 성정을 타고난 터라 이를 악물고 존중, 존중, 존중을 외쳤다. 계속 되뇌다 보니 어느 정도 습관이 되었다.      


 어쩌면 나에게 인생의 무의미는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삶에 어떤 특정한 목적이 존재해 내가 태어났다고 쳤을 때 나는 오직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하면 숨이 덜컥 막힌다. 무의미하기에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고 무의미하기에 쉽게 회복될 수 있다. 물론 내 주변에도 내 존재의 목적을 내 의사와 상관없이 만들어 놓고 주지 시키는 이들이 있긴 했다. 어릴 땐 꽤나 순종적이라 그게 진짜 내 목적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실패한 인간인가? 인간에게 실패란 무엇인가. 나는 단지 어느 특정 카테고리에서만 실패했을 뿐 인간으로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할 때 실패가 아닌가?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또 다른 말로 버티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버티다라는 단어가 싸우다, 달리다와 같은 단어보다 더 강한 동사라고 생각한다. 버티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압력을 온전히 맞으며 안간힘을 써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버티고 있는 모든 인간은 사실상 무엇이 됐든 실패한 인간일 수 없다.      


 소박할지라도 분명한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는 것이 화려한 무의미보다 낫다고, 어떤 사람에게 내가 하는 말은 신포도를 욕하는 여우의 헛소리와 같을지도 모르지만 누가 알까, 나는 아직 젊고 인생은 기니 내가 결국은 포도를 따먹을 지도. 다만 포도를 먹기까지의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일이다. 낙관, 희망, 열정, 쟁취와 경쟁 사이에 나는 전혀 다른 단어들로 과녁을 향해 나아가고 싶으니까. 나는 지금보다 먼 미래에 내가 원하는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떠랴.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자체다. 살아있으면 우리는 무엇이라도 된다. 노력이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는다 해도 시도 그 자체는 반드시 쌀 한 톨만큼의 변화라도 가져다준다. 인생을 무작정 낙관하고 긍정하는 것에 치를 떨지만 나는 그래도 삶을 사랑한다.      


 내가 정한 나의 꿈에 매몰되지 않게, 무엇보다 타인의 판단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나는 읊조린다. 인생은 무의미해.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정신 승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떠랴. 채찍질하듯 행복의 강령을 뒤집어쓰는 것보단 낫다. 행복을 믿는가? 행복이 대체 뭔데? 행복은 일시적 자극 아닌가? 행복도 지속되면 일상이 된다. 일상에서 권태를 느끼듯 우리는 행복에서도 권태를 느끼게 된다. 인정해야 한다. 계속된 행복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른다. 자신의 기쁨을 행복이라 착각해선 안 된다. 그러면 죽는다. 쥐처럼. 쾌락 버튼을 끊임없이 누르던 실험실의 쥐처럼.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삶에는 수많은 난관이 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행복을 바라기보다 지독하고 완전한 긍정을 꿈꾼다. 낙관과 희망으로 범벅된 조악한 강박이 아닌 아픔과 상실마저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 반복된 매일을 감사히 여기고 권태에 흔들리지 않는 인내, 꿈을 꾸면서도 현실을 직시하는 균형감.    

  

 삶이라는 우연 속에 운명 같은 내가 되고 싶다. 나라는 우연을 이 세상의 필연으로 만들고 싶다. 내 존재의 답안지를 누군가 만든다면 그건 나여야 한다.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바르게 가는 것이니까. 오늘도 반듯하게 누워 다가올 내일을 꿈꾼다. 여전히 무의식에 찌든 무의미한 꿈만 꾸는 밤이지만, 해가 뜨고 아침이 오면 나는 무의미한 생의 한가운데서 누구보다 힘차게 발버둥을 친다. 나만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리고 무언가 되기 위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실패한대도 상관없다. 어차피 인생은 무의미하고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뭐라도 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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