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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다행이다

내가 소설을 쓰며 배운 것

by 존치즈버거



나는 조금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에 갔다. 글은 항상 끼적이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거듭되는 낙방의 원인 내가 전문적인 글쓰기를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정작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중에 문예창작과 출신은 별로 없는데도 말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학교에 들어갔을 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어떤 작가 한 분이 그곳의 교수님으로 오셨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그분의 소설. 건조하고 묵직한 문체들의 서늘한 사이, 조용하지만 예리하고 정확하게 과녁으로 돌진하는 주제의식. 그분의 수업은 당연 인기 만점이었고 '피켓팅'을 방불케 하는 수강신청이었지만 운 좋게도 나는 그분의 수업을 학기마다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글을 좀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나는, 그분이 진행하는 수업에서 지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합평을 진행하겠다는 제안에 손을 번쩍 들었다. 결과는 혹평. 사건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단정적이고 대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줄이고 객관성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항상 들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그 점을 유념하며 소설을 써나갔다. 그리고 '그분이 진행하는 소설 수업을 통해 드디어 A를 받았다!'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그분의 수업에서 받은 최고점은 B+였다. 그렇지만 작은 성과는 있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듣게 된 소설 수업. 그분은 예전 학기에 제출한 나의 습작 소설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때보다 문장이나 묘사가 많이 좋아졌다는 칭찬에 어린아이처럼 명랑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분이 합평 수업을 통해 항상 하신 말씀이 있다. 단편 소설은 특히 인물에 집중하라고. 이야기를 극적으로 조성하거나 과장된 사건들로 인물을 조종하려 들지 말고, 단순한 이야기를 쓰더라도 그 사건이 만들어내는 인물의 내면과 그로 인한 삶의 파동들에 집중하라고. 사실 이건 말이 쉽지 실제로 써보면 조언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습작생의 야심과 대작가들을 향한 흠모가 만나 이상한 방향으로 내달음질 치는 소설들을 꽤 봤다. 그리고 습작한 작품을 내놓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만의 스타일과 문체를 가졌지만 일관된 어떤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나도 가지고 있다는 그 치명적인 문제, 관점의 문제였다.


나는 내 작품은 물론 다른 학생들의 소설 합평 시간에 그 교수님이 말씀하신 문제점들을 항상 메모했다. 교수님은 어떤 소설이 왜 좋고 왜 나쁜가에 대해 굉장히 세세하게 잘 설명해주시는 분이었다. 그분이 언제나 공통적으로 말한 조언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1. 성장은 사소하게, 사건이 너무 거대할 필요 X

2. 윤리적인 기준에 흔들리지 마라 -> 너 자신이 새로운 윤리를 만들라.

3. 구태의연하고 학습된 상식에서 벗어나라.

4. 인물에 대해 단정적으로 정의하면 X -> 묘사하라

5. 감정 표현을 너무 지나치고 자세하게 하지 마라.

6. 진부하고 빤하다는 생각이 들면 무조건 빼라.

7. 이야기로서 익숙해진 이야기(전형적인 패턴)는 다시 읽지 않는다.

8. 정서를 남겨라. 정서를 주는 소설을 써라.

9. 인물이다! 설령 사건이 약해도 인물이 가진 사유가 설득력 있다면 재미있는 소설이 될 수 있다.

10. 독자에게 남는 건 역시 인물의 '기분'이다.

11. 가족사를 말할 때 가족의 면면이 지나치게 드러나면 X

12. 기본적인 설정 오류에 주의하라.

13.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장을 쓰지 마라.


이 13가지의 조언들은 나도 늘 하는 실수였음을 이것을 메모하고 소설을 퇴고할 때마다 참고했다. 조언을 알고 있으니 그대로 실행만 하면 되겠지만 글이든 인생이든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법칙을 안다고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면 성경도 자기 계발서처럼 쓰였을지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직접 시도하고 실패하며 머리로 시작해서 가슴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다. 나는 객관성을 지키고 설명을 줄이며 대화를 이상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문장을 짧게 만들고 인물들의 행위를 묘사했다. 그리고 드디어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무 많이 울어, 지금 네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중에 제일 큰 오해가 슬픈 사람들은 계속 운다는 거야. 하지만 슬픈 일을 겪은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울기만 하는 것은 아니야. 성폭행을 당한 사람 모두가 자살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고 빚에 쫓기는 사람 모두가 사채를 쓰고 한강대교에 올라가지 않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그 개성에 따라 감정에 반응하는 방식도 달라. 이런 식으로 인물을 가둬버리면 읽는 사람을 억지로 꼬집어서 울리는 것밖에 안 돼. 누군가 울고 있다고 해서 '울음'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로 그 상황을 설명해서는 안 돼."


그랬다. 나는 아이를 잃은 어떤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아이를 낳고 커리에 지장을 받았던 엄마는 아이를 괜히 낳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리하여 사건이 있은 후 슬픔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남편에게 토로를 한다. 아이를 잃게 만든 기업은 책임을 지지 않아 부부는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가야 한다. 그런데 집에 아이가 살아있을 때 함께 공모한 이벤트의 사은품이 온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같이 수업을 듣던 한 학생이 "저번 작품은 너무 징그러웠는데(흑흑) 이번 소설은 정말 잘 봤어요. 언니 많이 늘었어요."라고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정말 고마워서 쭈쭈바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는 소설을 쓰며 최대한 감정에 객관적으로 반응하려 애썼지만 인물들을 너무나 슬픔의 구렁텅이로 떠밀고 말았다. 교수님도 정확히 그 부분을 짚어주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편견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슬픔이나 기쁨 같은 것뿐만 아니라 사건의 당사자가 보여주는 행동들. 소설에 묘사된 인물들의 반응은 결국 내가 특정 감정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그러니까 소설은 꾸며진 이야기지만 결국은 쓰는 사람의 감정이 이입될 수밖에 없고 인물이 아무리 나와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은연중에 나의 관점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정말 좋은 소설이란 우리의 삶을 재미있고 다채로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인물의 삶과 행위를 통해 인습적인 편견에 반기를 들고 그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여 사유를 더욱 폭넓게 만드는 소설일 것이다. 나의 소설은 인물에 대한 진정성은 가지고 있었지만 자칫 그 진정성이라는 것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는 관습적 프레임이 될 수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의 소설을 탁월한 소설로 이끌지 못하는 것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진 편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나름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소리였다.


풀이 죽지는 않았다. 어차피 창작의 과정은 끝없는 고뇌와 번민이 도사리고 있음을 아니까. 다만 교수님의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태도와 타인을 대하는 반응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내가 얼마나 자주 타인의 행동에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들의 말로를 단정 짓고 있었는지.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앞에 두고 얼마나 자주 눈을 감았는지. 물론 이렇게 깨닫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 자신의 치부를 인정해야 했고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침묵해야 했다. 나는 정이 많지만 조금 폭력적으로 타인의 삶에 충고를 던졌고 늘 약자의 편에서 생각했지만 정작 그 약자들의 삶에는 게으른 공감을 표할 뿐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한 번에 바꾸는 대신 조금씩 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세상을 보던 나의 좁은 시야가 아주 미세하게 다리를 벌린 것이다.


물론 내가 이제 모든 관념적이고 폭력적인 편견들을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말을 해놓고도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바쁜 삶을 핑계로 어떤 일의 이면을 보기보다 뉴스의 헤드라인에 의존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노력은 한다. 무언가를 단정 짓기에 앞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내가 상대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고민하는 역지사지의 태도를 시도한다. 그러한 반복된 시도들이 내 삶을 모조리 바꾸고 나를 등단의 길로 이끌고 가진 못 했다. 남들의 눈에 내 삶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삶의 주체인 나는 이 보잘것없는 삶에 얼마나 많은 기적이 찾아왔는지 안다. 그것은 자부심 넘치는 물질과의 교환도 아니었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강요도 아니었다. 온전히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 행한 것들이었다. 모두가 빠른 해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단정 짓지 않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을 얻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값진 성과가 아닐까?


학교를 졸업하고 육아를 하면서 글 쓰는 시간도 줄고 학교와 연도 더 이상 닿지 않아 교수님과도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열광적인 독자로 다시 돌아왔다. 그분의 신간이 나오면 득달같이 구매를 하고 그분이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나가는 행적들을 찾아보며 홀로 흐뭇해한다. 그분은 어쩌면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탁월하고 멋있는 작가가 내게 준 가르침을 나는 잊지 않았다. 기술은 연마할 수 있지만 태도는 글과 마찬가지로 살면서 끊임없이 퇴고해야 한다. 관점, 정서를 남기는 아름답고 울림이 있는 관점, 그것이 작가의 스타일이 된다. 소설가를 만드는 것은 꾸준함과 태도다.


번듯한 일자리 대신 소설을 배우겠다는 나의 열망이 주변 사람을 걱정시키던 때가 있었다. 이러다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나조차 불안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었고 직함을 얻지 못해도 인생은 굴러간다. 성과와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소설 수업을 통해 태도를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들은 작가만이 아닌 나를 사람 되게 하는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니 부디 앞이 막막할 때는 소설을 보라 말하고 싶다. 그 안에 해답은 없을지라도 나만의 답을 찾을 수 있는 퍼즐 한 조각쯤은 발견할 수 있으니, 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모든 조각을 찾아내고, 조각을 찾아냄과 동시에 어느덧 자신이 그 답에 당도했음을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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