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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만든 것은 지나간 사람들

절대 쿨한 부부는 아닙니다만...

by 존치즈버거



남편과 나는 21살부터 친구였다. 시사토론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모였지만, 사실은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20대만이 설파할 수 있는 치기와 호기로 버무린 나름의 (개똥) 철학 등을 발표하는 동아리에서였다. 즐거웠다.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때가 즐거웠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남편은 말쑥하게 차려입고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넸지만 어딘지 샌님 같은 냄새가 났고 시간이 흐르자 조금 재수가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남편은 자신이 영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토론대회를 앞두고 각자 역할을 분담해 토론 준비를 했는데 나는 발제문의 서론을 써오는 것이 임무였다. 그때 내 일과는 '늦게 일어나 술에 취해 잠들기'였는데 서론을 쓰는 도입부에서 이미 조금 취해있었고 다 쓰고 나자 거의 실신 지경이었다. 글은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 내 글을 검토하던 그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완전 엉망진창이네. 다시 써야겠다. 그래도 수고했어." 나는 그 날 싸이월드에 비밀글로 이렇게 적었다. '김XX 재수 없어. 복수하겠다.' (그리고 그 복수로 우리는 결혼을.......)


그렇다고 내가 남편을 싫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남편은 합리적이고 예의 발랐지만 말하는 태도에 있어 매우 직선적이었을 뿐 대부분 시간은 다정하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아이였다. 동아리 아이들은 서로 많이 친했다. 형사 영화에 등장하는 티격태격 파트너들처럼, 한 팀인 양 떼로 뭉쳐 만나고 작은 기숙사 방에 모여 새우 같은 것을 구워 먹기도 했다. 그러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서로의 연애와 비밀들을.


남녀가 다 같이 모여있다 보니 동아리 안에서도 연애 사건이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지만 정말이지 풋, 하고 끝이 났다. 남편도 그 안에서 연애를 했다. 나는 그즈음 남자아이들이 보여주는 연애의 허세와 기만에 지쳐있었다.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자신의 연애를 자랑하고 싶으나 그 표현 방식에 있어 다소 덜 떨어진 모습들. 남편은 좀 달랐다. 남편이 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나에 비해 빈도수가 조금 많았을 뿐, 친구였던 내 남편이 연애하는 모습을 지금 돌이켜봐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당사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남편의 연애는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다른 남자아이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남편은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싫은 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자기들끼리만 속닥 거리는 모습이 눈꼴사나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솔로의 질투였으리라. 나는 누군가 나에게 내 남편에 대한 평판을 물으면 이렇게 말했다.


"걔가 좀 사립학교 도련님 스타일이긴 한데 엄청 좋은 아이야. 자기 여자 친구들한테도 잘하고. 고민도 잘 들어주고 다른 남자 애들이랑 다르게 다정한 구석이 많아."


내가 남편에 대한 이런 미담을 쏟아내고 다녔다는 것을 남편은 알지 못한다. 어쨌거나 나는 남편의 연애를 응원하는 친구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단타로 강하게 훅을 날리던 남편의 연애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나는 남편의 여자 친구였던 그 언니에게 피천득의 인연을 선물하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서로 친하게 지냈다. 이렇게 말하면 "거기 할리우드야?"라고 묻겠지만. 아니다. 그곳은 북경이었다.


나의 진로 변경과 남편의 군입대로 우리는 연락이 끊겼다. 남편을 다시 만난 것은 25살의 여름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친하게 지내던 동아리 친구와 밥을 먹고 있었다. 휴가 나온 남편이 짧은 머리를 하고서 식당에 나타났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남편은 그때 내게 브로콜리 너마저의 CD를 선물로 주었다. 아직 계피가 멤버였던 시절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선물에 교정기 달린 치아를 숨기지 못하고 배시시 웃었다. 남편은 군입대와 동시에 그때 그 언니와 헤어지고 '다른 언니'와 또 연애 중이라고 했다. "넌 정말 연상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부지런한 남편의 연애에 엄지척을 날렸다. 짧은 만남은 아쉬운 작별로 이어졌다. 그 후로 또 2년 간 나는 남편을 보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주말에 술을 한 잔 하며 그때를 종종 기억한다. "우리가 다시 만난 27살에 네가 여자 친구가 있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결혼하지 않았겠지?" 남편은 쿨하게 대답한다. "그럴 수도." 하지만 우리는 만났다. 27살의 가을이었고 남편은 기적적으로(?) 연애 공백을 맞이하고 있었다. 언제나 떼로 뭉쳐 다니며 유아기 아이들처럼 떠들어 대던 우리는, 비로소 일대일로 만나게 되었다. 막걸리 주점으로 이자까야까지, 가볍게 시작한 우리 만남은 새벽 6시까지 이어졌다. 그다음 날부터 부지런히 카톡을 주고받았다. 고백까지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결혼한 사실을 농담처럼 들먹이며 쿡쿡 웃는다. "세상에, 너랑 나랑 말이 되니?"


외지에서, 가족보다 더 자주 보며 지내던 친구들이라 일급비밀이 아닌 이상 그 당시의 웬만한 사생활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남편 같은 경우 그즈음 유행하던 '네이트 톡'으로 서로의 연애 고민을 주거니 받거니 나누던 친구라 연애 전적에 대해서는 빠삭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친구를 기꺼이 남자 친구로 받아들인 것은 내가 지나간 연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전혀 쿨하지도 않았고, 한 번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상대방이 제발 내 인생에서 나가라고 거칠게 항의하기 전까지 '마음식음'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다. 내가 알고 보고 생각한 남편의 지난 사랑들은 그 횟수가 다소 빈번할 뿐 언제나 진심이 있었다. 남편은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자신들의 여자 친구를 함부로 말하는 일도 없었다. 친구들의 원성에도 아랑곳없이 여자 친구 챙기기에 앞장섰고 우리의 놀림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나는 그 사람이 너무 좋아."라고 말하던 아이였다. 나는 그런 그의 다정함이 좋았다.


20대, 나에게 '대성통곡'이라는 최악의 술주정을 장착시킨 한 남자를 잊기 위해 별 별 짓을 다 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매몰차게 나를 떠난 그 사람도 나에게 남긴 선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진심 어린 이별의 말이었다. 그 사람은 자존심 다 버리고 매달리던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정말 끝이야. 그렇지만 이건 알아 둬. 너는 내가 만난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야. 너는 정말 착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어. 그러니까 꼭 너만큼 가치 있는 사람을 만나." 당시에는 그런 한심한 개소리가 어디 있냐고 꺽꺽 울었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다시 용기 있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내게 건넨 찬사들 덕분이었다. 물론 그것이 면피용이었는지 어떤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라는 사람을 견딘 그들이 하는 말에 나야말로 토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남편과 나는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을 하고 예전보다 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주말에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우리를 거쳐간 연애와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큰 죄를 지었었지." 때론 반성도 하고 "그때는 진짜 그 사람이 전부인 줄 알았어." 어리던 우리 자신을 토닥이면서. 이렇게 말하고 나니 우리가 매우 쿨한 부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서로의 지난 사랑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고 과거의 소중한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 사랑들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서로밖에 없는 세상에서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매일 다짐한다. 흔들리지 않은 마음과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알려준 것은 지난날의 실수와 반성과 사랑들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우리'를 만든 것은 우리의 지나간 사람들 덕분. 30대가 된 우리 주변도 많은 정리와 변화가 생겼지만 우리는 잊지 않기로 한다. 우리의 지나간 사람들과 그 마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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