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엄마, 미안하지 않지만 미안해요
"많이 생각해봤지만.. 나는 또다시 당신의 과거를 모르는 척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다시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상처를 혼자 껴안고, 매일 당신이 바람피운 그 사실을 순간순간 떠오를 때마다 차마 말은 못 하고 참는 삶은..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우리, 이혼하자."
차마 더 이상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은 그는 하고 싶은 수많은 말을 삼키고 입술을 꾹 물며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래.
당신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그렇게 하자.
그동안 미안했어요. 이 말로는 부족한 걸 알지만.."
우리의 이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재산 분할에 대한 결정이었지만 역시 예상한 대로 그는 나를 위주로 생각하고 제안했다.
내게 위자료를 포함한 비중으로 재산을 나누자고 먼저 말을 해줬고, 나도 다른 이견없이 그러자고 했다.
놀라울 만큼 초고속으로 쉽게 끝난 재산분할이다.
자잘하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눌지는 세부적으로 정해야겠지만, 그와 나의 성격 상 큰 잡음 없이 무난히 정해질 것이다.
그다음 중요한 일은 양가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일이다.
이혼 서류를 내러 가기 전에 최소한 부모님께 알려드려야 도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혼을 합의한 뒤 돌아오는 주말에 각자의 집으로 따로 가서 우리의 결정을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에게 당부해놓기로 했다. 사위에게, 며느리에게, 절대 연락하지 마시라고.
그의 부모님이 이 소식을 듣고 만에 하나라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거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연락하지 않았으면 했다.
시부모님, 특히 시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애초에 썩 좋지 않았고, 본인 아들이 아깝고 넌 결혼을 굉장히 잘한 거다 라는 말과 행동을 나는 결혼 기간 내내 들어왔었다. 우리 부모님을 낮게 보고 사돈댁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언행도 하셨었다.
그런 수많은 사건들을 겪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끝도 없이 생각했었다.
'당신 아들이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왜 내가 이런 걸 혼자 참으며 살아야 하지?'
그래, 사실은 내가 그의 부모님에게 직접 찾아가서 다 말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완전무결한 것처럼 자랑하던 아들이 이런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닌 세 번이나 걸려서 이혼하는 거다, 결혼 초반에 이미 바람을 펴서 내 결혼 생활은 내내 지옥이었다, 그런 나에게 당신이 그동안 했던 말들이 얼마나 상처와 분노가 되었는지 아느냐, 우리 부모님을 무시하기 전에 당신이나 자식 교육 제대로 시켜라,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일단 쏟아내기 시작하면 아마 끝도 없이 뱉을 수 있을 독이 가득한 말, 말, 말.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죄를 지은 건 그였고, 그의 외도에 적어도 시부모님의 잘못은 없었다.
그리고 분명 그가 본인의 잘못으로 이혼하게 되었다는 걸 알리면, 시부모님도 마음의 벌을 받게 될 거라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에게 이혼 결정을 알리러 가는 날.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그냥 방문해서 말씀드리기로 했다.
언니에게는 이미 며칠 전에 그와 이혼하게 되었다는 말을 전화로 했었고, 이번 주말 부모님한테 가서 말씀드릴 테니 부모님 다 집에 계신지만 그날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아무 연락 없이 혼자 집에 오기로 했다는 말을 언니로부터 당일에 전해 들은 부모님.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전에 없이 밝고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신다.
'아.. 엄마.. 내가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깜짝 발표하듯 말하러 온 줄 아시나 보다..
아니에요 엄마. 그거 아니에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두 분의 기대 가득한 모습, 그 뒤로 난감한 듯 고개를 젓는 언니.
어쩔 수 없다. 말을 꺼내야 한다.
“아빠, 엄마. 갑작스러우실 수 있지만.. 저랑 그 사람이랑, 이혼하기로 했어요.”
흔들리는 동공으로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의 엄마.
제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