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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s Traveler Jan 03. 2023

낯선 곳에 가는 이유

사십 대를 제주에서 보내는 이유

어제는 숙제처럼 미뤄두었던 유방암검진을 하고 왔다. 막연하게 2년 정도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병원에 계실 때가 가장 마지막 검진이라 따져보니 이미 3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그때도 상급병원에서 유방촬영까지 했었고 1년마다 정기검진 소견을 이미 받은 상황이라 초조한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초음파 도중 선생이 내게 물었다. ‘검사하신 지 얼마나 됐어요?‘ 엄마가 암 4기 선고를 받았던 병원에서도 의사가 그렇게 물었었다. 내 몸 어딘가에 주홍글씨마냥 각인된 문장, [마지막으로 검진받은 게 언제예요]


엄마가 암말기가 되도록 모르고 산 것이 맏딸인 내 탓이라고 생각해서 괴로운 때가 있었다(아직도 불쑥 그렇다). 그래서 유방암이라는 병이 나에게 온다면 그것은 그저 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병기를 겪으며 배운 덕분에? 검사결과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법도 안다. 진짜 암덩어리가 이미 생겨버린 거라면 서울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으면 된다. 하루 이틀, 아니 한 달 이상이 걸린다고 해도 이제서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병상에 계신 엄마를 간호하며 학습했다. 찬찬이 명의를 찾아 수술을 받은 후 잘 먹고 쉬면 된다고 배웠다. 그게 아니라 결국은 생을 마친다 해도 그 끝은 엄마를 따라가는 것이다. 엄마는 외로이 홀로 떠났지만 식구들은 결국 또 더불어 잘 살아간다. 아쉽기야 하겠지만 크게 손해 볼 일이 아니다.


상급병원으로 옮겨 새로운 의사를 만났다. 가족병력을 묻는데 대답을 입 밖으로 뱉고 보니 나는 상당히 잠재적 암환자가 맞았다. ‘외할머니는 유방암으로 한쪽 절제술을 받으셨고요. 엄마는 대장암으로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 … 꽤 무뚝뚝해 보이던 의사가 뜻밖의 다정한 말을 해주어 별다른 질문 없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고 유방암검진은 종료되었다. ‘안 좋아 보이면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을 거예요. 그럴 것까지는 없어 보이고. 경험해 보아 다 알고 계시겠지만. 6개월 후에 봅시다.‘ 조직검사까지 하지 않는 이유, 검사를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의미, 서울에 가보라고 권유하지 않는 게 어떤 것들을 함축하고 있는지 나는 정말 다 안다. 그리고 이런 의사, 환자가 묻기도 전에 궁금할 걸 미리 말해주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거칠어 보여도 크게 상관없다. 돌아가신 엄마가 딸에게 다 알려주신 것들이다. 그래서 당분간 또 서울에 갈 일은 없다. 서울은 내가 아등바등 살 던 곳이다.


젊은 엄마를 갑자기 잃는 큰 일을 겪고도 여전히 삶에는 조바심이 나는 때가 많지만 서울에서의 나에 비하면 제주에서는 제법 여유가 생겼다. 치유받는다고 해도 될까. 낯 선 곳에서 사람들은 종종 본인을 좀 더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고집이 엄청 쎄 보이는 한 웹툰작가가 그토록 하기 싫다던 영어공부를 외국에 나가서야 하긴 해야겠다고 깨닫는 것처럼. 낯선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에 대한 사유’를 적게나마 할 수 있데 된다.


제주에서 나는 자연의 웅장함 앞에 조바심을 내는 일이 차차 (아주) 조금씩 줄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거친 제주 바람이 온몸을 훑어 주면 신기하게도 답답했던 마음이 금새 한결 나았다. 유달리ㅜ애쓰지 않아도 금세 편안해졌다. 그래서 제주 1년 살기의 계획은 조금 그 방향이 바뀌었다. #제주에서좀더살아요  #노세노세젊어서놀아 … … 뭐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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