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사 형준씨의 일일④ - 문학소년에게 닥친 절대절명의 위기(승)
쉬운 일은 아니지만 조금씩 패턴화되어가고 있어. 다시 재취업하면 한동안 못 쓸 수도 있기에 더 그런가?
하는데까지는 쭉 이어서 써 볼거야. 이번달도 잘 부탁해!
"오늘 병원에 갔다왔는데 6개월 판정을 받았다. 아빠 힘들게 하지말고 말 잘 들어 알겠지?"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도 이때였을거다. 만만치않은 병원비, 어머니조차 우리 형제를 돌보지 못할 때가 잦다보니 저녁은 거진 배달음식이었다. 학교마치고 집에오면 신발장에 넣어진 15,000원. 형 만원, 나 오천원이다. 남겨진 쪽지에는 이걸로 저녁 시키거나 사다먹으라며 미안하다는 어머니의 짧은 메세지가 적혀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몇 주 안되서 끊겼다. 집에 있는 반찬으로 밥을 먹다가도 매번 김치 아니면 고추장이나 간장 등이었으니 부족한 영양분은 제대로 채우지 못하기 일쑤였다. 쌀이 떨어져 밥을 못 먹을 때는 안성탕면 하나 사서 물 많이 넣고 죽처럼 끊여 형이랑 나눠먹기도 했었다. 집에 있는 동전이란 동전은 다 긁어 모으거나 빈 병을 팔아 번 돈으로 말이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챙겨주지 못할 때가 그랬던 것이지 오랜만에 어머니가 집에 오시면 최소한의 영향은 챙길 수 있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입원하였을 때 어머니가 간병하러 자리를 비우러가 간 기간이 하루 내지 이틀이었던 것으로 본다. 지금이야 간병서비스 및 관련 지원 등 서울시를 비롯한 각 지자체별로 시행 중이지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이런 제도가 없었다. 잘 모르기도 했고.
오매불망 나에게는 아버지의 회복이 우선이었다. 그러면서 학교생활하며 전처럼 일상을 보내려 무진장 애를 썼다. 우리 집 성향상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하는지라 친척들과 일부 이웃들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아버지가 덜 고통받고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계속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버지가 얼른 나아서 전처럼 여행도, 목욕탕도 같이가길 원한다고. 무너진 우리 집 다시 일으켜 세워달라고. 제발 죽지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