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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y Kim Apr 26. 2017

조선의 엘리트, 선비

조선의 엘리트 교육은, 꽤나 멋진 철학을 담아내고 있었다.

서양에 엘리트가 있다면, 조선엔 선비들이 있었다. 허구한 날, 글이나 읽고 앉아있던 한량들이 아니냐는 인식도 있는데, 사실 선비들은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꽤나 멋진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멋지진 않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배우고 자란 철학과 가치들은 현대의 기준에서 봐도 괜찮은 것들이다. 개인적으로 "전통"이라는 개념에 관해 꽤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도, 선비를 길러냈던 교육철학만큼은 멋진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소학 전문도 읽어보고, 중국식 고전 철학 공부도 조금은 해 봤다. 신기하게도 꽤나 오래된 철학이었지만 현대의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으며, 서양식 엘리트 교육과도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오늘은 고전 교육철학 중에서도 선비들이 갖춰야 했던 기본 소양인 '육예'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육예는 한자로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인데, 풀어보면 각각 예절, 음악, 활쏘기, 승마,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수학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조금 확장해보자면, 매너와 에티켓, 예술, 체육, 인문학 그리고 수학과 과학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식 엘리트 교육은 관직에 오를 사람들을 기르는 과정이는데,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내는 데에 그 중점이 있었다.


육예 중 첫 번째인 예는 단순히 매너와 에티켓을 넘어 국가적 행사의 의례와 의미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종묘에서의 제사나, 왕을 만나는 등의 공무를 수행할 때 알아야 하는 것들 말이다. 두 번째인 악은 음악인데, 악기 교육으로는 주로 거문고 연주를 가르쳤고 창과 판소리 그리고 시를 짓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사와 어, 그러니까 활쏘기와 말타기인데, 이는 무예를 의미한다. 선비라고 하면, 앉아서 글 읽고, 시조 읊는 이미지가 강한데, 활을 다루고 말을 타는 것도 중요한 소양으로 여기고 몸을 단련하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모두 선비 출신이었다는 점만 봐도 이들이 무예에 능통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선비들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고 해도, 목숨이 오가는 곳에서 칼을 못 다루고 활도 못 쏘는 사람이 지휘를 할 수 있었을까. 한국이 국제대회만 열었다 하면 양궁과 태권도에서 매번 금메달을 가져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네 가지나 되는 예, 체능 분야가 나온 이후에나 딸려 나오는 것이 서와 수. 그러니까 책 읽기, 글짓기와 수학이다. 書가 '글 서'자라고 해서 이것을 서예라고 좁게 보는 시각도 있는데 글과 관련된 모든 부분을 엮는 쪽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들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그 중점이었다. 그래도 공무원 할 사람들인데, 아는 것도 좀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산, 그러니까 수학은 과학 분야를 함께 넣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 이것 역시 세금을 걷거나 하는 등의 공무집행을 위한 지식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여섯 가지 모두가 선비로서의 기본 소양이라고 여겨졌다는 거다. 조선식 엘리트 교육은 단지 글을 읽히고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학문"이라 생각하는 것들, 그러니까 독서와 수학은 여섯 가지 중 마지막 두 개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머리에 똑똑함 넣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라는 얘기였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을 최우선으로 두고, 예술과 체육을 제쳐두는 현대의 한국식 공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가치들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사건들을 거치며 단절되고, 서양을 통해 들어온 엘리트 교육만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나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서양의 좋은 대학들에 가 보면, 다들 악기를 하나씩은 하고, 즐기는 스포츠가 있고, 취미가 있다. 거기에 파티에 참석하며 테이블 매너와 사람을 만나는 법을 배우고, 흔히 말하는 공부도 열심히들 한다. 물론 요즘 들어 한국에서도 예절, 예술과 체육교육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법으로 주목을 받고는 있지만, 좋은 인간을 길러내는 쪽이 가치 있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여전히 경쟁에서 우위를 차치하려는 의도에서 그러한 움직임들이 나온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전히 한국의 교육은 사람을 만든다기보다 책 잘 읽고 계산 잘 하는 문제풀이 기계를 길러내는 데에 중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철학 없이 지식만을 주입하는 교육법은 이미 도태 시기를 넘어섰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의 성장동력이 급격히 떨어져 가는 것 역시 잘못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길러냈기 때문이다. 평생 수능 공부나 하던 한국의 청년들이 어떻게 국제무대에서 매너와 예술과 지식을 두루 갖춘 서양의 엘리트들과 친목을 도모하는 동시에 경쟁할 수 있을까.


사서삼경을 다시 가르치고 유교를 숭상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소한 우리도 서양식 엘리트 교육과 비슷한 수준의, 꽤나 멋진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하자는 거다. 물론, 앞으로의 교육정책이, 지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길러내는 방향으로 변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도 있고 말이다. 조선의 엘리트, 선비. 그리고 그들을 가르쳤던 교육철학. 우리가 다시금 주목해야 할 멋진 가치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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