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예쁘다."
남편이 말했다
"누구? 나?"
"아니, 저 단풍 색깔... 왜 여태 몰랐지? 단풍이 저렇게 예쁜지."
물오른 단풍 미모에 밀린 나는 괜히 샐쭉해져서 남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하아... 진짜 이쁘네."
반박을 할 수가 없는 단풍의 미모였다. 빨갛고 노랗고 하늘마저 새파란,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총천연색 창 밖을 보느라 넋을 잃고 있는 와중에 거무튀튀한 형체의 무언가가 내 앞을 쓰윽 지나갔다. 10살 딸아이였다.
온 세상이, 있는 힘껏 자신의 색깔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시점에,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검은색으로만 치장한 존재, 바로 내 딸이었다. 딸은 얼마 전부터 상하의를 모두 검은색으로만 코디하고 있다. 살다 살다 이런 날이 오다니. 빨래를 개킬 때마다, 옷장을 열 때마다, 눈앞에 등장할 때마다 나는 매번 놀라웠다. 사람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 싶어서.
▲ 네 살과 열 살의 온도차이. 핑크 연보라 드레스만 입던 아이가 십대에 들어서자 검은색 풀착장만 하고 다닌다.
딸은 한때 동네 유명인사였다. 핑크와 연보라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고 드레스가 아니면 콧방귀도 안 뀌었다. 온갖 화려한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고 한겨울에도 스타킹을 신고 유치원에 갔다. 사람들이 '공주님이네' 하고 알아봐 주면 기쁜 듯 새초롬한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운 건 나의 몫, 딸의 자존감은 하늘을 뚫을 기세였다.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그나마 덜 부끄러웠던 건 또래 친구들도 거의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어서였다. 정작 공주님들은 당당한데 길에서 마주친 공주 엄마들의 눈빛에선 동질감이 느껴졌다. 목례만 가볍게 하고 재빠르게 지나갔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주목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그 시절은 어디로 가고 10살이 되자마자 아이는 거짓말처럼 색깔이 들어간 모든 착장 템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찬양하던 핑크는 밀어내고 오로지 검은색만 찾았다. "핑크색은 창피해, 부끄러워, 눈에 띄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내 아이만 그런 게 아니었다. 등하굣길에 마주치는 아이들을 보면 남녀 할 것 없이 대부분 무채색 향연이다. 가끔 화사한 색깔 옷이 눈에 띄면 그건 백발백중 저학년이거나 유치원생이다. 요즘 같은 겨울은 더 심하다. 비슷비슷한 검은색 외투를 벗어두고 놀다가 니꺼 내꺼 구분 못하고 대충 입고 갔다가 바뀐 외투를 찾는다고 수소문하는 일은 매년 빠짐없이 벌어지고 있다.
십 대에 들어서면서 튀는 색상을 거부하는 딸,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가장 예쁠 나이,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이 시기의 아이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검은색을 선호하는 것일까? 이제는 형광 반짝이 옷을 입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마흔 줄의 아줌마는 그것이 몹시도 궁금하였다.
검은색 애호가인 당사자에게 물었다. 그녀는 핑크와 노랑, 보라 같은 밝은 색은 공주병 같고 눈에 너무 잘 띄어서 싫다고 했다. 그 색깔이 아니면 안 된다고 울고 불고 떼쓰고 할 땐 언제고, 사람 마음 돌아서는 건 역시 시간 문제다.
그런데 왜? 눈에 띄는 게 왜 싫어졌을까?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처럼 한번 물고 늘어져 보자. 눈에 띄면 타깃이 된다. 누구의 타깃이 될까? 그것은 바로 선생님과 어른들, 그리고 힘을 과시하는 아이들이었다.
선생님 눈에 띄면 발표를 시키고, 어른들 눈에 띄면 괜히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힘을 과시하는 아이들의 눈에 띄면 괴롭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집단성이 강한 아이들 사이에서 다르다는 것은 배척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최대한 눈에 안 띄고 주변과 비슷한 검은색으로 자신을 보호색 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난 너희들과 비슷해, 다르지 않아"를 색깔로 대신 말하고 있는지도. 어쩌면 눈에 띄었을 때 긍정적인 시그널이 없어서 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색을 드러내려고 할 때마다 "가만히 좀 있어", "어린 네가 뭘 알겠니?", "나대지 마" 같은 어른들 입맛에 맞는 색깔로 아이를 덧칠해온 건 아니었을까?
색깔은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다. 의복 색상으로 직업군을 구분 짓기도 하고, 심리상태를 알아보기도 하며,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검은색을 선호하는 상징적인 이유를 강한 집단성에서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개성의 상실이라며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몰개성이라고 혀를 끌끌 차기보다 아이들이 찐개성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아이들 놀잇감 중에 스크래치 페이퍼라는 것이 있다. 그냥 보면 검은색 종이인데 뾰족한 것으로 살살 긁으면 그 안엔 예쁜 색깔들이 드러난다. 나는 아이들이 스크래치 페이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지금은 온몸을 검은색으로 똘똘 감추고 있지만, 그 속을 살살 긁어내면 예쁜 오색 빛깔이 숨어 있는 것이다.
얼마나 예쁜 색을 가지고 있는지는 정작 본인들만 모르는 나이. 앞으로 다른 색들을 만나 융화되고 희석되고 변화하기도 하며 진짜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나갈 것이다.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핑크로 투머치 한 시기를 귀엽게 보았듯, 현재의 거무죽죽한 시기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떤 색을 찾아 나갈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인정해주자.
참고로 거무죽죽한 색을 추구하는 딸과는 달리 나는 점점 더 비비드 한 색이 좋아지고 있다. 아, 관심받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