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게 된 날을 기억한다(물론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독립적인 인격체지만 거의 샴쌍둥이처럼 지내다 보면 이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4학년 2학기, 아이가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오겠다고 선포한 순간이었다.
편의점에서 계산하는 것도 쑥스러워하던 애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게 무섭다고 내 손을 빌리던 애가, 탄산음료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가, 친구들과 편의점 원형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과 스포츠 음료를 먹고 오겠다고 하던 그 순간. 복잡한 감정이 파도처럼 나의 마음을 철썩, 때리고 지나갔다. 아이의 진짜 사회생활이 시작됐다는 사인. 즉, 내가 모르는 아이의 사생활이 늘어날 거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하필 편의점일까? 나는 왜 친구들과 편의점 간다는 아이의 말에서 홀로서기의 신호를 강하게 느낀 것일까. 사실 아이의 독립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는데 말이다. 혼자 학원을 가고, 빈 집을 지키기도 했으며, 친구들과 한참을 놀다 오기도 하던 아이였다. 나는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홀짝이며 아이와 편의점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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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고학년 아이들의 성지인 편의점. 그곳에 진출하게 된 내 아이에게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 편의점과 아이 사이엔 어떤 연결고리가 있기에 내가 독립 혹은 인격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 것일까? 무리지은 고학년 아이들은 왜 편의점을 아지트 삼는 것일까? 쓸데없는 생각이 취미인 나는 생각하는데 돈들지 않음을 감사하며 열심히 또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내 몸에 붙어 있는 손발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편의점을 진중하게 생각하자 굉장히 특이한 곳으로 느껴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마트도 아니요, 식당도 아니요, 카페도 아닌데 그 모든 기능을 함께 하는 곳. 그것이 한 동네에 수십 개씩 있고 24시간 내내 누구에게나 오픈돼 있는 곳.
맥주 한 캔에 과자 안주를 먹어도 괜찮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주차하고 불닭 볶음면을 먹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 키즈 카페처럼 아이 눈높이에 맞춘 곳도 아니고 어른 카페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식의 부자연스러움도 없는 곳, 누가 가도 조화로운 편의점. 그 곳은 진정한 '공존의 공간'이었다.
편의점은 어린이라고 배척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 노인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작업복을 입어도, 양복을 입어도, 치마를 둘러도, 어떤 차별과 평가도 하지 않는다. 편의점에선 누구든 필요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평하게 존중받는 그곳에 내 아이가 홀로 입장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언제 이렇게 컸대...'라는 마음에 또다시 뭉클해졌다. 마트도 같은 맥락이지만 어린이가 장바구니를 들고 가서 계산하는 장면은 쉽사리 연상되지 않는다.
아이는 편의점에서 대인관계를 맺고 소비 주체자로 경제 거래를 하고,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조리하며 뒷정리를 한다. 키즈라는 부호를 빼고 인간 그 자체로 활동하고 존중받는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아이는 자라난다. 그리고 더 넓은 곳으로 확장되어 간다. 그래서 나는 그 첫걸음인 편의점이라는 공간에 특별한 의미부여를 했던 게 아닐까?
사실 아이들에게 이 같은 공간은 흔치 않다. 초3을 넘어가면 놀이터는 시시하고, 피시방은 이른 감이 있다. 분식집은 어느 순간 천 원짜리 몇 장으론 범접할 수 없는 비싼 음식집으로 변모했고, 키즈카페는 동생들이 가는 곳으로 인식한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 터무니없이 적다. 하지만 편의점은 열린 공간인 만큼 아이들에게도 활짝 문을 열어주었다.
유현준 건축가는 한 방송에서 초등학생이 편의점을 많이 가는 이유에 대해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휴대전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엔 방과 후 자유 공간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지만 텔레커뮤니케이션이 발달된 요즘, 아이들이 감시받지 않는 공간은 별로 없다. 학교, 학원, 길거리 등 늘 확인과 감시를 받지만 편의점에서 만큼은 자유롭고 건전하며 천 원짜리 과자 한 봉지로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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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10살 된 딸이 친구들과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겠다고 한 적이 있다. 내가 단호박처럼 안 된다고 하자 아이는 친구들과 얘기 나눌 공간이 없는데 어떡하냐며 반문해왔다. 놀이터는 춥고, 집은 코로나로 모일 수 없고, 카페는 부모들 없인 못 가고, 대체 친구들과 어디서 놀아야 하는 거냐고 울분을 토했다.
'그러게... 어디서 놀아야 하는 것일까?' 답 없는 물음표만 무책임하게 던져놓은 채 나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들이 편의점을 즐겨 찾는 것은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대안의 공간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어린 마음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들은 더 이상 어린이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서로 존중하자, 약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말 대신 어린이의 마음을 기억해내고 그 마음이 되어보기를 권한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세상을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말처럼 눈앞에 수없이 펼쳐진 편의점을 어린이의 마음으로 들여다볼 것을 권해본다. 편의점에 모여 앉아 신나게 먹고 떠드는 어린이의 마음을 살펴보자. 그러면 앞으로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 나가야 할 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라도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