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가 없다. 낙이 없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다. 축축한 날씨 탓인지 마음도 영 맥을 못 추고 있다. 계속 누워 있고 싶다. 간헐적으로 웃기는 유튜브를 의미 없이 보고 싶다. 그러고 있어도 전혀 죄책감이 안 들고 싶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우울증에 걸린 신민아가 왜 계속 물에 홀딱 젖어 있는 상태로 묘사됐는지 이해가 될 것 같다. 나는 우울증은 아니지만 나를 쥐어짜면 젖은 빨래처럼 물이 뚝뚝 흐를 것 같다. 몸이 무겁다. 단순히 체중만의 문제는 아니다(아니겠지?). 건조기에라도 들어갔다 나오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고, 한 남자의 아내이고, 여러 아이들의 글쓰기 선생님이다. 하기 싫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엉망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빨래, 설거지, 청소, 수업 준비, 아이 돌봄, 하루 이틀쯤 놔버릴까 싶다가도 금세 차오르는 일더미들을 떠올리면 정신이 더 산란해져서 그러지도 못한다. 아... 장마철 무기력을 뽀송하게 말릴 비책이 필요하다.
'연예인 덕질을 해볼까?'... '내 것이 될 수도 없는데... 뭐'
'매운 음식을 먹어볼까?'... '다음 날 속 쓰림 어쩔 거야.'
'쇼핑을 할까?'... '어디 나갈 데는 있고? "
'책을 읽을까?'... '고마하자 마이 읽었다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하며 틈틈이 부지런히 무기력해졌다. 그러던 중... 나는 발견했다. 여름철 무기력을 한 방에 날려버릴 무기를... 그것은 바로 냉장고 안에서 다소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맥주였다.
'이 여자, 술 좋아한다는 말을 참 이상하게 돌려서 말하네...'라고 할지라도 맥주에 대한 내 진심을 이렇게라도 고백하고 싶다. 요즘 나를 가장 즐겁게 해 주는 맥주에 대한 찬미를 말이다. 눅눅한 여름에 이보다 더 청량한 위로는 없다.
맥주라고 쓰기만 했는데도, 슬슬 흥이 오르기 시작한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다음에 쓸까? 미루려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맥주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고 손가락이 신들린 듯 움직여진다. 맥주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맥주는 나에게 와서 의욕이 되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는 캔맥주다. 종류는 따지지 않는다. 대체로 편의점 4병, 만 원 행사하는 맥주를 산다. 1.5L짜리 용량의 뚱뚱이 맥주나, 병맥주가 가격 면이나 건강상에는 더 나을지 모르지만, 나와 호흡이 가장 잘 맞는 것은 캔맥주이다.
맥주는 목 넘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얼얼한 몸통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뚜껑을 딸 때부터가 맥주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니, 캔맥주의 뚜껑을 딸 때, '따/깍' 하는 그 소리가 바로 맥주의 시발점이라는 뜻이다. 손으로 돌려 따는 플라스틱 마개와 번거로운 병따개가 필요한 알루미늄 뚜껑은 캔맥주의 뚜껑이 가진 매력을 절대 따라올 수 없다.
'따/깍' 그 소리에 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화나는 일, 짜증 나는 일, 힘든 일도 그 소리를 기점으로 스르르 풀리곤 한다. '따깍' 소리에 긴장을 풀고 나면 '치이익' 하는 소리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편의점에서 갓 사온 맥주는 비닐봉지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이내 거품을 물곤 하는데, 넘쳐 흐르지 않게 '후르릅' 한 입 훔치는 게 또 재미가 있다.
맥주를 마실 때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은 꼭 유리잔에 따라서 마신다는 것이다. 남편은 캔에 직접적으로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NO~No~ 그것은 맥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황금빛 보리의 영롱한 빛깔을 봐줘야 한다. 브랜드 맥주가 되기 위해 그 얼마나 힘든 숙성의 시간을 거쳤을지... 투명한 유리잔에 '코왈 코왈 코왈' 따라서 보리의 노고를 인정하고 쓰담해줘야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맥주는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듣는 음료인 것 같다. 맥주를 따를 때부터 마실 때까지 보고 듣는 재미가 솔솔 하기 때문이다. 맥주를 오픈하면 유리잔을 비스듬히 기울인 뒤, 거품이 살짝 차오르게 따른다. 잠시 맥주 그 자체의 모양새를 음미한다. 자태도 예쁘지만, 맥주에서 나는 소리도 킹왕짱 좋다.
작은 물방울이 유리잔에 달라붙으며 '포그르르' 탄산기포가 터지는 소리. 누군가는 소주를 따를 때 나는 영롱한 소리를 들으려고 소주를 마신다고 했는데 (엥?) 나 역시 맥주를 막 따랐을 때의 탄산기포 터지는 소리를 들으려고 맥주를 마시는... 건 아니지만, 그것 역시 맥주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맛은 말해 무엇하리. 씁쓸하면서도 청량하고, 청량하면서도 깊고, 깊으면서도 부드러운 맥주의 맛. 꺼끌꺼끌하고 텁텁한 입 안을 전문 세신사가 세신해주듯 씻겨준다. 요즘 수제 맥주니 과일 맥주니 다양한 맥주들이 나오고 있지만, 나에겐 편의점 맥주가 제일이다. 맥주가 떨어지면 슬리퍼를 끌고 '다다다' 달려가서 사 올 수 있는 편의성과 냉장고에 나란히 줄 세울 수 있는 규격화된 크기, 부담 없는 가격, 뭣하나 빠지는 게 없다.
습하고 더운 날, 꼴깍이 아니라 벌컥벌컥 터프하게 들이켜고 나면 나의 위장, 소장, 내장에서도 기포가 톡톡 터지는 기분이 든다. 나의 무기력 세포들을 주물러 터트려서 '왕' 먹어버리는 느낌이다.
맥주를 마시는 시간도 중요한데 아무리 지치고 힘들다 해도 아침 댓바람부터 맥주를 마실 순 없다. 그래서 나는 무기력을 모은다. 모으고 또 모으고 또 모아 오후 5시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 나에게 오후 5시란, 길을 걷다가도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체력과 정신의 시간이다. 이때 맥주를 만나면 이산가족 상봉만큼이나 반갑고 눈물겹다. 그러니 행복의 밀도가 엄청나게 높아진다.
그렇다고 연달아 서너 캔을 마시는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 딱 한 캔만 마신다. 딱 그 정도의 UP, 딱 그 정도의 상쾌함, 딱 그 정도의 배부름이 좋기 때문이다. 그 한 캔이면 남은 저녁 시간을 의욕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다. 지금까지 무기력녀의 맥주 예찬기였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건, 큰 무언가가 아니다. 지친 오후에 맥주 한 잔이, 갓 구운 빵 하나가, 오랜 친구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이. 나의 기분을 움직이는 사령탑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땀나고 습한 여름, 짜증과 무기력 대신 나의 기분을 심폐 소생할 그 무언가를 찾아보자.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_최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