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통증이 재발하다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눈을 꿈벅이며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밥을 먹고 볕을 쬐며 티비를 보다가 또 점심을 먹고, 너무 집에만 있으면 안된다고 외투만 걸쳐 입고 나가 공원을 한 바퀴 걷고, 추워지는 계절을 느끼고, 다시 돌아와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있으면 어느 새 날이 어두워지고 그러면 또 저녁을 먹고선 잠이 들었다. 침대까지 가는 것도 힘들어, 소파에 하루종일 서식했다. 담요를 푹신하게 깐 소파에서 낮잠도 자고 밤잠도 잤다.
속 편하게 생각하면 한시적 백수인 셈이니, 하루종일 쓸데없는 일을 맘껏 해버리는 게 은근히 재밌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비생산적인 시기가 또 있을까 싶었다. 이 사회에 아무것도 기여하는 것 없이 숨만 쉬고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또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도 걸핏하면 어지러우니, 안 좋아도 별 수 없긴 했다.
회사로의 복귀가 가까워졌을 때즈음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허리가 아팠다. 굉장히 아팠다. 어느 정도냐면, 다리가 저려 자다가도 깰 지경이었다.
아파서 누워있어야 하는 게 고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누워있는 것조차 아파서 할 수 없는 더 큰 고난이 있을 줄이야.
내 허리 통증의 역사는 이미 길고 지난했다. 동네의 정형외과는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고, 한 해 전에는 급성 통증이 와서 일주일 일을 쉰 적도 있었다. 더 몇 년 전, 하루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아파 주말 내내 누워서만 지낸 적도 있었다. 그 때 월요일이 되자마자 영상의학과에서 MRI를 찍었을 때 내 허리는 이미 사망 선고를 받았었다.
터졌네요.
영상 판독의 첫 말과 함께 내 눈물도 터졌었다. 암선고를 받은 사람마냥 구는 스스로가 가소롭다고 한켠으로 생각하면서도 터져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디스크가 튀어나오다 못해 찢어져 흘러내렸다는 건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였다. 어쩔 줄 모르고 그대로 영상의학과에서 추천한 유명한 정형외과를 가서 주사를 맞았다. 문진에서 그동안 내가 운동도 하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그래서 내가 지금 얼마나 억울한지 호소했지만 늙은 의사는 ‘누구 허락 맡고 운동하래요?’라며 단칼에 내 말을 잘랐다. 문진 내내 눈 한 번 쳐다보지 않는 그 태도에 나는 단번에 질렸다. 그렇게 물건 취급을 받고서는, 구부정한 자세로 돌아가는 내 앞에 펼쳐졌던 교대역의 깊고 높은 계단에서 나는 서러움에 또 울음을 터트렸다.
4-5번 디스크가 터져서 주변 근육 부하가 심하니까 주변을 누르기만 해도 아픈 거에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빠질 수 있는 건지..
영상만 보면 젊은 분 허리가 아니라 노인 분 허리가 같네요.
동네에 새로 생긴 정형외과의 첫 진단은 그래서 놀라울 건 없었다(그래서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다만 잠이 안 올 정도로 아픈 건 처음이라 무서웠다. 맨 처음 사망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다리가 저리냐’는 질문에는 속으로 콧웃음을 치며 그게 웬 이상한 질문인가 했는데 예언처럼 이젠 다리가 아팠다.
주사를 몇 번 맞아보자는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스테로이드 주사는 아닌지, 내가 지금 수술을 받은 지 겨우 한 달이 넘었다는 걸 서둘러 알렸다-그 뒤로도 어느 병원을 가든 내 병력을 기계적으로 읊고 게 금새 익숙해졌다. 의사는 괜찮다고 했다. 그러고 나는 '허리 주사'를 여덟 번도 넘게 맞았다.
가깝게 일하던 동료 한 명을 떠나보내며 나는 회사에 복귀했다. 6주 정도의 시간이었다. 긴 시간을 비운 게 처음이라, 그간의 일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아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런 걸 챙길만한 몸 상태가 아니기도 했고.
바로 어제도 일하던 사람 같은데요.
그런데도 첫 회의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습관처럼, 지친 육체의 말초까지 헤집어 필요한 지식을 꺼내오고 할 수 있는 해결책을 떠올리고 있었다. 뒷머리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