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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10. 2020

"지금 이 순간" 들여다보기

뭐라 종잡을 수 없는 어수선함으로 밤잠까지 설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추종자는 아닙니다. 그래도 나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청렴했고 낮은 곳을 향해 손을 내밀었던 분이었기에 말없이 응원을 했던 사람입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했던 당시의 혼란이 재현되었던 지난밤입니다. 그저 해프닝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안타까운 소식은 아침 어둠을 뚫고 청천벽력같이 다가왔습니다. 안타까움과 혼돈의 아침입니다.


아침 하늘은 잔뜩 비를 머금고 점점 짙은 회색으로 변해갑니다. 무거운 마음이 하늘로 연결되는 듯합니다. 대기의 배경색이 회색으로 단일화되니 출근길에 만나는 꽃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들어옵니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마음의 색과 자연의 색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 말입니다. 내 마음이 그러면 자연도 그러하리라는 통념은 한낫 인간의 오만과 자만과 착각에서 비롯된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이 아침 또다시 생생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뜰 수목의 초록잎 숲에서 붉거나 흰색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덩굴장미, 능소화, 나리꽃, 산수국, 나팔꽃, 심지어 전철역 텃밭에 있는 감자꽃과 옥수수의 붉어지는 수염, 그리고 흰색 도라지꽃도 눈에 들어옵니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아무 관심이 없는 자연입니다. 삶과 죽음조차 짙은 구름에 가려진 현상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역설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시간의 켜를 짊어진 덩굴장미와 산수국은 이미 노쇄해져 가고 있음도 눈치챕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데 오늘만 유난히 많이 눈의 띈다는 것은 어디에 집중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의미 있는 대상으로 부각되는 현상입니다. 죽음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성이 튀어나온 듯합니다.


꽃들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분명 꽃들이 시간차로 꽃을 피우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화식물들이 진화하면서 바로 시간을 차별화하는 전략을 펼쳤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꽃들이 똑같은 시기에 핀다면 곤충들의 자연선택에서 기회를 많이 상실하여 도태되는 꽃들이 많았을 겁니다. 꽃들은 바로 꽃이 피는 시기를 조절함으로써 모두가 살아남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花無十一紅은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열흘 이상 피는 꽃이 있긴 하지만 활짝 피어 꽃수술을 모두 보여주는 시기는 딱 그만큼 만입니다. 환경이 척박한 곳에서 자라는 꽃일수록 그 기간은 점점 짧아집니다. 반나절만에 지는 꽃도 있습니다. 꽃에 따라서는 밤에 피는 꽃도 있습니다. 밤의 정령인 나방의 비행에 기대어 진화한 꽃입니다. 시간을 나누어 공존하고 공생하는 꽃의 세계는 그래서 화사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움이 배가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꽃들은 시간의 niche를 찾았기에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생물은 바로 이 niche를 어떻게 개척했느냐가 생존의 기로였습니다. 고래가 바다로 돌아간 것도 육지에서의 먹이활동보다 바다에서의 먹이활동이 블루오션이었기에 다시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도 나무 위에서 초원으로 내려오면서 직립보행을 하게 됩니다. 풀숲에서 멀리 보기 위해서는 두발로 서야만 가능했습니다. 진화는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 복합적 원인의 불확정성의 산물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경이를 표합니다. 죽음조차도 '본래무일물'의 자리도 돌아감을 받아들이면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경이를 눈치채게 됩니다. 자판을 옮겨가는 손가락의 현란함은 어떻게 자음과 모음을 기막히게 찾아가는지 기적의 현장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시선과 상황들이 때론 여유로 다가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눈높이의 수위는 이렇게 다름을 알아챕니다.


아니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다름이 바로 변화라는 사실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학습받아 왔습니다. 이전과 다름이 무얼 의미하는지 인간의 유전자는 너무도 절실하게 경험을 했고 그 경험치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생성 137억 년, 지구의 생성 46억 년,  그 속에 단세포 생물로 생명의 기원을 시작하여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시간의 기억입니다. 지구에 생명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이후를 1년으로 표시한다면 현생 인류가 등장한 것은 11월 중순에 해당합니다. 그 장구한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환산하려 하는 자체가 무리입니다.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작은 시간을 사는 인간이 어찌 우주의 시간을 들먹일 수 있을까요 그건 허영이자 만용 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선각자들이 깨달은 것이 "지금 이 순간"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논해봐야 인간의 눈으로 이해되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죠. 


지금 이 순간,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실을 보고 있는 그 자체가 경이이기에 여기에 만족하는 길이 최선의 인간 생존의 목표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선지자의 지혜들은 바로 시간을 이해한 깨달음에서 왔습니다. 종교와 정치, 문화 모든 인간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습들은 구성원들이 형성하고 있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형상들임을 금방 눈치채게 됩니다. 


불금의 이 아침, 우리 사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죽음의 선택을 보며 조용한 침잠 속에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선명한 거울로 마음을 닦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청동거울 정도는 만들지 않았을까 관조해 봅니다. 그분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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