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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04. 2020

'시간의 지배자', 시간을 만들어라

출근길 전철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왔더니 눈이 침침하다고 하나요. 눈앞이 안개 낀 것 같습니다. 멀리 보면 괜찮은데 가까운 것을 볼 때 이러한 현상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근시인 노안인 것 같습니다. 시간의 세월에 장사 없다지만 이런 시간의 현상들이 차츰 나의 육체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가끔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의 현상들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합니다. 영원히 늙지 않고 싶은 영생불멸의 존재이길 바라고 자기만은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고 최면을 걸며 살아오다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배불뚝이 모습을 직면하는 순간, '살을 빼야 되는데'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빅뱅 이후 시작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의 화살'로 존재합니다. 우주만물 어느 것 하나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간에 상대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환호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시공간의 통합을 통한 상대적 시간 흐름의 개념 때문입니다. 뉴턴의 고전역학처럼 '세상 만물에 동등히 적용되는 것이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살아오다, 시간이 각자 개인에 따라 달리 흐른다는 논리는 세상을 보는 인식 패턴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구 상의 좁은 공간에서는 상대적 시간 개념을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인식할 수 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층빌딩의 고층에 사는 사람과 저층에 사는 사람에게 물리적 시간은 달리 흐릅니다. 그러나 그 지구중력에 의한 시간차는 수억 분의 1초에 지나지 않기에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차가 있다는 것은 지구를 너머 은하계와 우주로 확대하면 정확히 인식되고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휴대폰과 자동차 내비게이션 사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시간을 붙잡고자 했던 많은 선인들이 있었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죽음을 정의하지 못한 무지 때문입니다. 그저 시간 가는 것이 두렵고 예기치 않고 다가올 그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제럴드 에델만 같은 신경과학자들이 상대적 시간 개념조차 깨버리는 새로운 개념을 의식을 통해 시간의 방향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기도 합니다. 세상 만물을 주기율표로 설명할 수 있듯이 세상 만물을 원자의 크기인 미시세계로 들여다보면 시간이 흐른다는 주장이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로 발전해 이젠 시간은 어느 방향으로도 흘러갈 수 있음을 눈치채는 단계에 까지 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태양과 달과 나무가 눈에 보이고 붉은 낙엽이 만져지고 낙엽 타는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거시 세계 속에서 범주화된 우리의 의식은 이 거시 세계의 시각을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시세계가 뭉쳐 거시 세계가 되었음에도 거꾸로 거시 세계에서는 미시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한계로 인하여 시간의 방향성에 한치의 의심도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미시세계에서는 늙는다는 개념을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늙으면 당연히 죽는다고 하지만 죽어 돌아간 원자의 세계는 동등합니다. 많고 적음이 있고 그렇게 될 확률만이 존재합니다. 시간의 정의와 개념은 원자의 세계에서는 사라진 사어일 뿐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받아들임"을 너무 육체적 변화 관점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장 눈에 띄어 볼 수 있으니 당연한 관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을 너무 지우려 하지 않는 것도 시간의 삶을 사는 지혜일 수 있음을 엿보게 됩니다. 흰머리카락 더 생기면 어떻고, 눈가에 주름 하나 더 늘어나면 어떨까, 남이 보는 내 모습에 집착하기보다는 내가 주시하는 내 모습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잠깐 건방진 생각을 해봅니다.

주말마다 시간이 되면 10km 조깅을 합니다. 뛸 때마다 생각합니다. 왜 뛰고 있는지 말입니다. "미래의 건강한 삶을 위해? 젊어 보이기 위해?"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결론은 미래와 젊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조깅을 하니 심장도 좋아질 테고 심폐기능도 향상될 테고 다리 근육도 증가될 테고 전신운동이니 온 몸에 좋을 것 같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운동했는데도 본인도 모르는 자연의 부름이 있을 수 도 있고 예기 치도 않던 췌장이나 다른 질병의 위협에 노출될 수 도 있습니다. 운동과 미래의 안정적인 건강은 분명 상관관계가 있지만 필연은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다. 운동이 미래의 시간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위안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프라시보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 가능성을 예측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할 것이냐는 것은 다른 차원의 접근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뛰고 있다"는 인식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더도 덜도 아니고 지금 달리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달리는 목표이자 희열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시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바로 조절입니다. 항상 똑같은 패턴에 익숙해있다가 조금 다른 시간과 장소를 통해 새로움을 익히는 것이 진화의 순리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반복되는 것에 우리의 뇌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반복된다는 것은 이미 그 패턴대로 행하면 생존에 문제가 없음을 알기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것을 보고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고, 안 가본 곳을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다름의 비교, 삶을 유지하고 전진시키는 동력입니다.


'시간의 지배자'는 내 안에 있습니다. 시간을 만들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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