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Nov 10. 2020

'이 순간' 살아 있고 살고 있음이 경이다

거리에 온통 낙엽이 쌓여있습니다. 도심의 가로수들도 하루하루 다르게 붉고 노란 잎들을 대지로 돌려보냅니다. 예전 같으면 매일매일 아파트 경비원들이나 거리를 청소하시는 분들이 치웠을 낙엽들을 근래에는 당분간 그냥 놔두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나름 운치와 여유가 생긴 것일까요? 덕분에 낙엽 덮인 거리를 걸어 출근을 합니다.


이 아침엔 아파트 사이사이로 골바람도 솔찬히 떠돌아다니며 낙엽들을 굴리고 있습니다. 낙엽 구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젖은 낙엽들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른 낙엽들은 바람 따라 딩굴딩굴 굴러다닙니다. 더 낮은 곳, 바람 없는 한적한 곳으로 몰려갑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사각사각 소리도 나고 도르르르 소리도 납니다. 


광합성의 작용을 멈춘 후 잎에선 물기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줄기로부터 물이 올라오지 않으니 나뭇잎에 남아있던 물기마저 한 톨 남기지 않았습니다. 줄기에 붙어있을 최후의 습기마저 날려 보낸 후 낙엽이라는 이름으로 대지로 내려옵니다. 대지의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변태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에너지는 돌고 돕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가고 또 모여서 형태를 만들어내고 어떤 것은 대지 속으로, 어떤 것은 생명체로, 그렇게 본래의 모습을 바꾸어 등장합니다. 거기에는 삶과 죽음도 없고 이를 정의하는 언어조차 대입이 안됩니다. 더 근본적으로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억 겁의 인연은 그렇게 항상 있어 왔습니다. 참 경이로운 일입니다.

일상에서 희망을 보고 삶의 경이를 느낀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대오각성하고 나서도 며칠 지나면 다시 예전의 정신상태로 회귀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정진 수도하여 깨달음에 다달았다고해서 사람의 형태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밥 먹고 똥 싸고 하는 일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깨달음은 "지금 사는 동안 바로 이 시간에 있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깨달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깨달음의 연속임을 말입니다.


그 느낌은 개별적이고 개인적이라 타인에게 알릴 수 도, 전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저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 존재에게 주어진 공통된 원리입니다. 뒤집어 들여다보면 세상 존재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존재의 필요성이 있기에 이 시간 이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무관심하게 지나쳐오지 않았나 되돌아봅니다. 눈꺼풀 하나 깜박이는데도 다 이유가 있고 사무실 공기 순환을 위해 천정에서 들리는 바람소리 조차도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성이 바로 존재의 이유라는 사실을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러한 것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조용히 화면과 그대와 대화를 나눕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무의식적으로 자판을 오가는 손가락의 경이를 지켜봅니다. 자판에 쓰여 있는 철자들을 보지도 않고 화면만 보고 글자를 만들어 내는 능력 말입니다. 수없이 반복되어 손가락이 자음 모음의 위치와 간격을 알고 있듯이 아침이 오면 언제나 이 대화의 경이가 펼쳐짐도 관조해 봅니다. 


자연스러움. 그것은 오랜 반복으로 체득된 체화의 결과물입니다. 오늘도 그 결과를 편지함에 넣어 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추울수록 밖으로 나가 뛰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