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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10. 2020

보내는 일에만 충실하겠습니다

아침 출근을 전철로 하다 보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은 되겠죠? 같은 전철 칸에 있지만 반경 3~4미터 안쪽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테고 환승역에 내려 갈아타려고 다른 플랫폼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앞뒤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으면 백여 명은 족히 넘을 겁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전철 칸을 타면 역시 똑같은 사람들을 보게 될 거라 생각되지만 되짚어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분명 아침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매일 바뀌지는 않을 테고 매번 다른 칸을 탑승하지도 않을 텐데 말입니다. 같은 패턴으로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같은 행동 양태들을 보이는 게 일반적인 모습일 텐데 왜 딱 떠오르는 대상이 없을까요?


REM 수면상태의 꿈을 꾸다 잠을 깨면 연기처럼 사라진 꿈의 기억처럼 꿈이 아닌 현실에서 본 실체조차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바로 시각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감각 정보를 기억에 저장하지 않고 배경으로만 인식하는 브레인의 작용 때문입니다. 시각정보 모두를 기억해 내려면 우리는 그 저장용량을 감당하기 위해 뇌의 크기가 지금보다 훨씬 커져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두꺼운 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외부로의 확장이 생물학적으로 제약을 받습니다. 뇌의 크기가 더 커지려면 후손들을 낳는 여성들의 골반도 더욱 커져야 하는 것입니다. 제한된 용량에서의 효율화를 위해 최적화된 패턴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Relation'과 'Network'는 우리의 사고와 의식 패턴을 형성하는 중요한 키워드인 것입니다.


시각정보는 특이한 것, 독특한 것에 시선이 고정되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특이한 것이 나의 생존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와 같은 것들은 이미 경험상 나의 생존과 또는 나의 현실과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다른 것, 특별한 것은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에 경계하고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중이라는 현상이 생깁니다. 지켜보고 살펴봐서 그 존재가 어떤 것인지 파악해야 나와의 관계가 구체화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필요 없는 것인지, 그래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전철에서 수없이 많이 보는 사람들이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나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글을 써 보내는 이유는 그것을 받아보는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공유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소중한 관계에 대한 관심인 것입니다. 기꺼이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창작자의 손을 떠난 글은 더 이상 창작자의 것이 아닙니다. 오롯이 받은 자의 것입니다. 보낸 글을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감성에 활용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받은 자의 역량에 달려있습니다. 받은 글을 휴지통에 버려 버리든, 아침마다 귀찮은 간섭으로 받아들여도, 그것은 전적으로 받은 자의 선택이며 관심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보내는 사람의 역할은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받는 사람이 그것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는다고 서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심과 무관심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매일 아침 글은 중요한 의미로 재탄생됩니다. 현재 기억에 대한 기록이며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에 대한 공유이며 감성에 대한 나눔입니다. 보낸 이와 받는 이의 공유와 감성이 비슷하다고 느껴질 때 관계와 네트워크는 더욱 공고해집니다. 아침마다 편지함에 쌓이는 '글'은 관심과 관계의 경계에 있는 키워드이자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보내는 저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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