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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30. 2021

일상에서 보물 찾기

고등학교 친구 녀석 6명이 모인 카톡방에 "새벽 6시에 출근했네" "내일 사무실 개소식이 있어 마무리 작업하느라 이미 나와있다" "우리 나이에 이 시간에 사무실에 나와있는 건 기본 아닌가" 등 이른 아침부터 시끌시끌합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서로 일상 신고를 하고 오늘 하루도 힘들겠지만 잘 버텨내고자 하는 말없는 격려이자 확인입니다. 나이 들어 아침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들이 있기에 현장 속에 있어야 하는 숙명 같은 겁니다. 모두들 오늘도 잘 버티고 잘 이겨낼 겁니다. 퇴근시간이 되면 노력의 성과들이 차곡히 쌓여 산을 이룰 겁니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3,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Gilgamesh)도 친구의 죽음을 보고 영원히 죽지 않고자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가 불로 영생의 약초를 구하지만 뱀이 먹어버리고 다시 인간의 운명을 깨닫습니다. 불멸의 영생보다는 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으면서 유쾌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고 또한 가고 싶어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가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ㅠㅠ) 자연과학의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수소와 산소와 탄소 등 원자가 모였다 흩어지는 현상일 뿐이라고 생명을 규정한다고 해도 '나'라는 존재 자체는 우연이 겹치고 겹쳐 영겁의 우연이 쌓여야 일어나는 무한대의 확률 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그렇게 내 의지로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와 보니 이미 규칙이 정해져 있습니다. 낮과 밤의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정한 규칙이 있고 DNA로 각인된 관계 속에서 학습되는 지식과 지혜 속에서 살아내야 합니다. 

뭐 이런 황당한 상황이 있을까요?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지구의 자전이 멈추고 태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조건 그 상황에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야 겨우 자연이 있고 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숨 쉬는 것이 무엇인지, 밥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거창하고 높은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이 아침 눈뜨게 됨을 감사하며 아이들이 자기 방에서 팬티바람에 아직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느끼면 됩니다.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살아내고자 하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상의 모습을 전하는 일은 삶의 힘을 보태는 일입니다. 시시콜콜 하찮은 사진일 듯 보이지만 카톡방에 옮겨 다니는 일상의 얼굴 모습 하나하나가 보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미를 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SNS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지금도 여기저기 SNS에 각자의 일상과 생각들이 무제한으로 올라옵니다. 정보량이 넘쳐납니다. 바로 의미를 전하고 의미를 알아채기를 원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일상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으면 바로 일상이 행복이 됩니다. 오늘도 일상에서 웃음과 기쁨과 행복을 캐내어 보시지요. 커피 한 잔, 차 한 잔 속에도 숨어 있으니 보물찾기 하듯 하면 즐거움도 배가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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