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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28. 2021

아버지의 무게

우리는 요즘 감동이 없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물 나고 가슴 먹먹한 사연이나 현장에 서 있던 적이 언제 있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만큼 메마른 세태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눈물이 날 지경이다. 아니 그만큼 밋밋하게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큰 변화 없이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몸을 맡기고 떠가는 수준이 아닌가? 무엇을 해도 재미없고 무엇을 봐도 그저 그런,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큰 불안 없이 그저 평온하게 사는 게 잘 살고 있는 것이라 위안을 삼기엔 이 세상이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니 세상을 보는 눈의 높이를 높이고 두리번거리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무한대의 세상에 어찌 감동과 눈물과 환희의 장면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보지 못하고 내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주변이 온통 거짓과 위선과 자만이 판을 치는 현장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핑계를 댈 뿐이다. 강도와 살인과 강간이 난무하는 세상으로 정보를 흘려보낸다. 자극적인 장면에 눈이 가고 귀가 쏠린다. 점점 극한으로 치닫는다. 흉악과 패륜이 공존해야 평화와 안정이 돋보이기 때문에 일부러 보여주는 악행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고 듣는 현상이 나의 기억을 만들고 나의 생각을 쌓고 나의 행동을 창출한다.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듣느냐가 나의 품격을 만든다. 귀를 씻고 눈을 씻고 마음을 씻고 세상을 볼 일이다.

지난 추석 연휴기간 중 KBS에서 2014년에 방영했던 '파노라마 히말라야人'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재방송했는데 우연히 보게 됐다. 다큐멘터리 내용은 '히말라야 오지인 차다(chaddar)에서 아이들을 도시의 학교로 보내기 위해 열흘을 영하 20도의 얼어붙은 강을 따라 내려가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예전 같으면 꽁꽁 얼어있을 강이 기후변화로 녹아내려 살얼음으로 변한 구간이 많이 있어 그 차디찬 얼음물속을 속옷 차림으로 아이들을 업고 강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위험한 강기슭을 기어 돌아가기도 한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헌신. 영하의 차가운 강물에 신발과 바지를 벗고 과감히 들어갈 수 있는 아버지의 간절함은 어디서 오는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났다. 감히 소파에 편히 앉아서 영상을 볼 수가 없었다.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봐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영상 속 아버지들에게 힘이 될 듯해서이기도 하고 그 삶의 애잔함에 내 삶의 가벼움을 꿇고 있는 무릎으로 가두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영상 속에는 손자를 학교로 데리고 가는 할아버지도 있다. "힘들다. 그럼에도 이 방법밖에 없다." 울먹이는 할아버지의 이 말은 내 가슴에 무거운 돌이 되어 얹혔다.


자식들을 학교 보내기 위해 목숨까지 위태한 '학교 가는 길'을 선택한 아버지들은 얼마나 간절한가! 내 발은 차가운 얼음물에 빠질지언정 아이들을 등에 업고 내딛는 물밑의 발걸음은 얼마나 조심스러운가 말이다.


아! 아버지. 그 삶의 무게는 오직 아버지의 무게다. 책임져야 할 무게임을 아버지는 직감하고 있다. 차가운 물에 들어가 동상이 걸릴지언정 내 자식 발이 동상에 걸리면 안 된다는 본능의 무게다. 나의 유전자를 전할 자식들을 대하는 천부의 사슬이다. 이 차가운 얼음길을 걸어가 학교에 보내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녀린 희망, 공부만이 히말라야 오지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소망이 얼음물에 발가벗은 아버지의 다리에 실려있다. 그 험한 학교 가는 길을 건너와 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들여보내며 눈물짓는 아버지들은 다시 그 험한 얼어붙은 강을 다시 맨발로 건너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매일 밤 아이들을 희망으로 바라보며 히말라야 산 꼭대기 신의 영령에 기도를 할 것이다. 그 지독한 가난과 그 험준한 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말이다. 아이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올 때가 되면 아버지들은 다시 그 험한 길을 걸어갈 것이다. 부쩍 커있을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험하고 차가운 물길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있다. "공부하면 지금보다는 잘 살 수 있다"는 너무도 소박한 바람 말이다.


히말라야를 떠나 지금 이 시간 나는 아버지로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 히말라야 차가운 얼음물 속을 걷는 아버지의 가녀린 두 다리를 가슴에 품고 있어야겠다. 그래야 두 눈에 글썽이던 눈물이 그저 감성에 머물지 않고 다큐멘터리 보는 내내 꿇고 있던 무릎에 감각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의 무게는 그렇게 지금 내 어깨 위에 얹혀 있지 않은가? 들떠 일어나 걸어야 하고 또 언젠가는 뛰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 모습이자 아버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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