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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26. 2022

단어 선택의 엄중함

인간은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언어가 곧 생각이고 생각이 곧 inner talking의 언어다. 언어는 단어의 나열이다. 나열된 단어가 문장을 형성하고 문장이 문맥을 이루어야 의미가 전달된다. 각각의 단어만 나열해서는 정확한 의미의 전달이 안된다. 단어가 문장 속에서 기능을 하고 그 기능이 연결되어야 비로소 언어로써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정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이어가는 기능어들을 잘 조합해야 한다. 단어의 선택이 부정확하거나 연결 조사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불분명해진다. 애매모호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정확성이 생명인 언어에 있어 부정확한 전달은 소용이 없다. 오해만 불러일으킨다. 불신의 원천이 된다. 세치 혀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언어의 온도 - 이기주)"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언어의 온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구성품이 단어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온도 차이가 극과 극을 표현할 수 있다. 사랑의 밀어가 있고 시위 현장의 끓어오르는 선동의 언어가 있으며 비즈니스 성사를 위한 설득의 언어도 있다. 상황 상황에 따라 장소에 따라 사용되는 언어는 제각각 그 기능을 하게 된다.


인류사를 뒤흔들었던 인물치고 달변이 아닌 사람을 찾기는 드물다. 나폴레옹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다. 선전 선동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있어 천재적인 사람들이다. 물론 나폴레옹의 뒤에는 참모였던 베르티에(Berthier)가 있었고 히틀러에게는 프로파간다를 예술이라고 주장한 괴벨스(Gobbels)가 있어 그들을 포장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설을 하는 데 있어 군중을 휘어잡는 능력은 현란한 단어의 사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괴벨스의 어록으로 오해되고 있는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문장의 섬뜻함이 프로파간다의 부정적 의미를 대변하는 클리세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프로파간다의 언어는 자극적이고 강렬하다. 분노를 끓어오르게 만들어 무력으로 표출하게 만든다. 이 역시 단어 선택의 힘이다.

반면 사랑의 언어로 속삭일 때는 부드러움이 생명이다. 거친 단어를 사용해서는 생겼던 애정과 연민까지도 밀어내게 된다. 단어의 형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랑의 단어에는 모나거나 각진 형태가 없다. 사랑의 언어에는 부드러운 혓소리와 입술소리들이 주를 이루고 'ㅇ'과 같은 둥근 모양의 단어들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ㄱ'과 같은 격하고 거친 어금닛소리로 만들어진 사랑의 언어는 찾기 어렵다.


시위 현장의 단어를 보자. '싸우자~'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철천지 원수~' '투쟁~~' 거칠고 자극적인 단어가 기능어로 사용된다. 거친 감정을 자극하여 분위기를 몰아가고자 하는 의도된 단어 선택이다. 전쟁에서 징집병들을 투입하면서 기초 훈련조차 할 상황이 안되면 며칠 동안 군가를 부르게 하여 감정을 고양시킨 후 전선에 투입하기도 한다는 설이 있다. 방아쇠를 당길 수 만 있으면 되고 고지를 향하여 돌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상에 자극받은 무모함을 고양시키는 일임을 극단적으로 사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멀리 갈 것 도 없다. 흔히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욕의 경우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 새끼" "쪽팔려서 어째~~" 듣는 순간 상스럽고 천박하다. 이런 욕을 듣는 순간 욕하는 사람의 감정 상태가 그대로 전달된다. 뭔가 상황이 자기 뜻대로 안 될 경우 회피전략이자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내뱉는 감탄사 같은 것이다. 듣는 사람은 다 안다. 사실은 말하는 사람이 더 쪽팔리다는 것을. 


그만큼 단어의 사용은 엄밀하다. 어떤 단어를 끌어내어 사용하느냐에 따라 감정의 높낮이를 조율해낸다. 또한 때와 장소에 따라 단어 선택도 달라져야 함은 자명하다. 말과 글의 무서움을 알아야 한다. 한번 내뱉고 한번 써놓으면 주워 담을 수가 없다. 목의 가시처럼 박혀있는데 빼낼 수 없다. 영원한 주홍글씨가 된다. 말로 하기 전에 글로 쓰기 전에 고민과 고뇌에 대한 진실의 시간을 갖고 나서 표현해야 한다. 여과되지 않은 말은 아예 하지 않고 입 다물고 있는 것이 훨씬 낫다. 사회적 위치가 높아질수록 더욱 그렇다. 장똘뱅이 강패라면 뭔 소리를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언어에서 그 사람의 수준이 드러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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