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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18. 2022

실수를 받아들이는 태도 차이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에 있는 것 같다. 자연과학자는 자신의 연구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결과 예측을 잘못했을 경우 바로 인정한다. 아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검증과 실험을 통해 결과물을 보여주어야 하기에 예측했던 결과물이 다르게 나오는 현상이 발견되거나 하면 바로 예측 실패를 시인한다. 결과와 숫자로 보여주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는 현장이 자연과학의 현장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의 현장은 치열한 검증의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오류가 나오면 바로 수정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길을 찾아 연구에 매진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자신의 연구와 결과물에 오류가 있어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인문학은 숫자와 검증으로 결과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관념에 따른 판단에 의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 상황을 놓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옳은 것이 된다. 옳다고 생각했기에 주장했고 발표했는데 반론을 제기하면 내가 주장한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인정할 수 없다. 끝까지 내 주장이 맞다고 우긴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에게 조언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일말의 조언을 했다가는 손절당하기 일쑤다.


사건과 사물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는다. 세상사 참 신기하기 그지없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은 지난 9월 말 칼럼에서 "가르치려는 것은 잘난 척하는 것이고 고언은 걱정하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고언을 "가르치려 하지 마라"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너보다는 한 수 위"라는 우월주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아무도 제대로 된 조언을 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명확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정치인에게는 공감능력이 생명이라 타인의 마음을 사는 것이 기본인데 타인의 마음을 사려면 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따끔한 고언이다. 상대는 전혀 받아들일 자세가 안되어 있을 테지만 말이다.

윗면 가운데 고동색과 그림자진 부분의 가운데 주황색은 같은 색이다.

인간의 브레인은 두개골 뼈의 감옥에 갇혀있다. 바깥세상을 직접 접할 수 없다. 오감을 통해 들어온 전기신호를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합리화하는 절차를 거쳐야 바깥세상을 볼 수 있다. 지금 내가 보고 느끼고 만져지는 모든 세상은 모두 브레인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착시가 대표적인 경우다. 착시는 시각기능이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걸작품임을 보여준다. 시각체계는 2차원으로 맺힌 상을 3차원으로 해석해야 한다. 입체로 보려면 외부 조명과 관계없이 사물의 원래 밝기를 해결해야 하는데 브레인은 이를 자동으로 보정한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 감안하여 사물의 밝기를 재현해내고 최종 보정 결괏값으로 바깥세상을 입체로 본다. 비록 사실과 다른 착시를 만들어낼지라도 사물의 명암을 인지해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가 보는 시각이 다른 것이다. 자연과학자는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해석하는데 숫자를 쓰고 인문학자는 상상의 관념을 쓴다. 어떤 것이 더 명확할 것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해석의 차원이 다르다고 변명할 소지도 없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자연은 인문학자들의 오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진화된 실패를 끼워 넣었다. 진화 과정에 실패와 실수를 집어넣음으로써 최적화 지점을 찾아갔다. 자기가 만족하는 최선이 차선의 차선일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한다. 실패해 보기 전에는 자신의 선택이 최선임을 알지 못한다. 실패해보지 않은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자연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사의 철칙이다. 브레인 시냅스에 있어서도 좋은 흥분전달만 계속 들어오면 시냅스가 태만해진다. 적당히 에러가 들어와야 두 번째 시냅스가 긴장을 한다. 인간 군상도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다. 생명의 시작부터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소년등과일불행(少年登科一不幸 ; 젊어서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이 첫 번째 불행)이라고 했다. 실수와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음을 경계하는 문구다. 실수와 실패는 잘못이 아니다. 경험을 쌓고 오류를 점검하는 중요한 단계다. 신뢰도를 높이고 경각심을 주는 주재료다. 실수와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도전만이 살벌한 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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