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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08. 2022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

길 가다가 새똥 맞듯이 그냥 던져보자.


"어떻게 죽고 싶은가?"


많이도 물었던 질문이지만 명쾌한 답을 얻었던 적도 없었던 질문이다. 아니 답을 회피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괜히 무거운 것 같고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고 바보 같고 침울하게 만드는 것 같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마지막의 뉘앙스가 너무 충격적으로 박혀있어서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산다는 것과 같은 거라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거라고" 쇼크를 누그러트리기 위한 온갖 감언이설로 머릿속을 채워도 두려움이 압도적이라 걷어내기가 불가능하다. 이태원 사고와 같은 허망한 일을 목도하고 나면 더욱 그렇다.


죽음은 '공포'로 다가온다. 대상이 있다. 실체가 있다. 그러나 간접 경험만 할 뿐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데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필연적 결정론의 세계다. 내가 겪어보지도 않은 일로, 나에게 닥치지도 않은 일로 불안해한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해보지 않았기에 닥치지 않았기에 더 불안하고 무섭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목덜미를 잡아채는 기분일 테다. 바로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벌벌 떨며 맞이할 것인가? 당당히 마주할 것인가? 이왕이면 당당히 맞서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한다.


그럼 나는 어떻게 죽기를 바라는가?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처럼 당당하고 싶다. "유언이 끝나고 그 사람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이불을 걷어 올리며 일어서려고 했어요. 부인인 류바와 저와 이웃사람 몇이 뛰어가서 말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 모두를 거칠게 밀어 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서 창틀을 부여잡고는 먼산을 바라봅디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기도 했어요. 그렇게 창살에 손톱을 박고 서서 죽음을 맞았어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더구나 간호사와 의사의 도움 없이 그렇게 당당하게 맞이하고 싶다. 


이 죽음에 대한 주제는 작년에 여기 브런치 글에도 이미 썼었다. (https://brunch.co.kr/@jollylee/233) 주기적으로 생각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 있기 때문일 수 도 있다. 그럴 만도 하다. 지난해 12월 갑상선암 수술로 오른쪽 갑상선을 적출하는 수술을 하고 1년이 되어 가고 있다. 지금은 갑상선 호르몬제 복용을 아예 끊어보는 4개월 임상실험 중 2개월이 지나고 있다. 신체적 기능 변화는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어 적응은 제대로 하고 있는 듯하여 안심을 하고 있다. 덕분에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고 있는 듯하다.


작년 글에도 언급했지만, "죽음은 나에겐 모든 것이고 남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오롯이 내가 받아들이고 이겨내고 곰삭혀야 하는 일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아모르파티(Amor fati)를 되뇌며 삶에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 


"언젠가 죽을지 모르니 이 순간을 즐기며 살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죽음에 대해 고뇌하고 받아들이려 했던 인류의 수많은 선인과 성자들이 내뱉은 죽음과 삶에 대한 성찰의 문구다.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마사초(Masaccio)가 그린 '성 삼위일체(Trinitas)' 프레스코화가 있다. 선 원근법을 구사해 그려진 최초의 그림으로 평가받는데 이 그림의 아래쪽에는 무덤이 그려져 있다. 무덤에서 부활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 석관에 누워있는 해골 그림 위쪽으로 "나 역시 한때 지금의 당신 같았고, 당신 역시 언젠가는 지금의 나와 같을 것이다"라고 묘비명이 쓰여 있다.


조르바처럼 당당히 서서 죽음을 맞이하려면 정신줄을 놓아서도 안되고 근력이 떨어져서도 안된다. "정신줄도 있고 근력도 있으면 아직 죽을 때가 안된 거 아닌가?"라고 의심이 들겠지만 그런 당당함으로 세상의 끝과 마주하는 일은 멋진 정리일 수 있다. 멋지게 죽기 위해 정신줄 잃지 않도록 공부하고, 두 다리, 척추의 힘으로 꼿꼿이 서서 다닐 수 있도록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죽음이란 녀석과 악수하고 포옹이라도 하려면 말이다. 죽음이 덮쳐오지 않고 내가 스스로 걸어가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를. 


이런 글을 쓴다고 112에 신고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염려 붙들어 매시라. 나는 아직 50년은 더 버티고 서있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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