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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10. 2022

아는 사람이 訃告 당사자일 때의 당혹감

급격한 기온차가 발생하는 환절기가 되면 부쩍 자주 들리는 소식이 있습니다. 부고(訃告 ; 사람의 죽음을 알림)입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요즘 같은 시간과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의 순간들에 해당합니다.


환절기 부고는 주로 연로하신 부모 세대의 운명을 알리는 것이 대부분일 경우가 많습니다. 심한 온도차로 인해 노쇠한 신체가 적응하는데 곤란을 겪다 발생한 사건들일 확률이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환절기 부고가 잦은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생명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적당한 온도의 항상성(homeostasis)입니다. 항온 동물인 인간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온도차의 폭이 커지면 반응하는 신체의 에너지와 기능도 급격히 따라가야 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잘 따라가서 버틸 수 있으면 유지, 못 따라가서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게 생명의 모습입니다. 한치도 거스를 수 없는 생명의 현장입니다.


이런 와중에 가끔 부고를 받아 들고 화들짝 얼어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고가 아닌 다음에야 가족이나 친척들의 부고를 갑자기 받을 일은 없습니다. 가까운 친척 중에 연로하셔서 병환 중이거나 요양원에 계시거나 하는 경우가 있어 웬만하면 자기 주변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인지하고 있기에 부고를 받아 들면 '때가 되었음'을 확인할 뿐 큰 충격으로 까지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부고란'에서 발견하면 혼란스러워집니다. 그것도 유가족의 이름에서 발견하는 게 아니고 망자의 이름으로 보게 되면 말입니다. 망자와 있었던 과거의 추억과 사건과 에피소드들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쏟아져 떠오릅니다. 망연히 부고 속 이름을 응시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이 그런 상황입니다. 출근하여 이것저것 회사 이메일을 체크하는 와중에 부서 단톡방에 부고가 하나 띵똥~하고 올라옵니다. 당직자들이 매일 기사 보고를 하는 와중에 언론사 인사들의 부고 소식도 같이 알려주는데 첫 번째로 보이는 이름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보통 부고에는 망자의 이름이 먼저 나오기보다는 유족 중에 대표자 이름이 먼저 나오고 " ㅇㅇ 부친상" "ㅇㅇ 모친상"이런 알림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이름이 보이길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나?"하고 빈소가 어디지 하고 읽어보는데 이런 부고의 당사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잘못 읽었나?"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분명히 제가 아는 사람의 이름이 망자의 이름으로 적혀 있습니다.

유독 오늘 받아 든 부고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과의 여러 사연 때문입니다. 아직 펄펄 뛰어다니며 일을 할 50대 중반의 나이밖에 안 되기 때문이고 해당 언론사 최고의 미남 기자로 손꼽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기자 초년병 시절, 저희 회사를 출입하여 인연을 맺은 관계로 얼굴을 안 지 20년도 훨씬 넘었습니다. 배려와 인정이 많은 기자였습니다. 해당 언론사의 여러 보직을 맡고 바쁜 와중에도 저희 건물을 지날 때면 가끔 가판대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검은 비닐에 담아 들고 올라오셨습니다. 꼭 취재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끈끈한 정으로 들러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제가 근무하는 부서의 부서장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빈소로 조문을 왔습니다. 코로나로 장례식장 조문이 금지되었다 완화된 시점이라 마스크를 착용하고 조문은 가능했던 시기였습니다. 빈소 앞에서 여러 조문객과 인사를 하는 와중에 마스크를 쓴 한 사람이 다가와 '고생이 많다'며 인사를 합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옷차림만 봐서는 누군지 식별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는 없는지라 의례적으로 '오랜만입니다'하고 상투적인 인사말을 하는데 눈치가 빠르신지라 마스크를 살짝 내려 얼굴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누군지 얼굴과 이름이 매치가 안됩니다. 그러자 " 저 ㅇㅇㅇ이에요"라고 이름을 말합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너무 미안했습니다. 이름을 듣고 사람을 알아볼 정도로 무심했던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분이 몇 년 전부터 암 투병을 하고 있었던지라 그 멋있었던 외모가 거의 무너지고 머리숱도 많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너무도 변한 모습에 예전의 모습을 오버랩시키지 못했던 겁니다. 본인은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경우가 자주 있었던 모양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듯 두 손으로 악수를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미안했던 마음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는데 오늘 부고를 접하고 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1년여를 버티시고 기어이 이별의 길을 떠났습니다.


누구나 갈 길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불현듯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스틱스(styx) 강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산다는 것을 되돌아보고 그래서 더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게 합니다. 삶의 경계가 모호하고 애매할수록 더 치열하게 살아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망자의 의례공간인 빈소(殯所)의 빈(殯)은 죽음사(死) 변에 손님 빈(賓)입니다. 이승을 떠나 저승의 귀한 손님으로 가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손님으로 가시는 행장(行狀)에 편지 한 통 적어 넣습니다. 영면하시고 극락왕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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