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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30. 2022

찻잎에 담뱃잎이 오버랩되다

출근하여 회사 메일을 체크하고 평소의 루틴대로 생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거름망이 장착된 차 전용 병에 담아 자리로 돌아옵니다. 작은 Saturn Tin에 덜어놓은 TWG 나폴레옹 블랙티 찻잎을 거름망이 있는 전용칸에 한 꼬집씩 3차례 정도 넣습니다. 홍차 베이스에 바닐라향과 캐러멜 조각이 브랜딩 되어 있는 차 인지라 달콤한 향이 부드럽게 코끝에 닿습니다. 저는 Tin의 뚜껑을 여는 순간 전해지는 찻잎의 향기가, 차를 마실 때 전해지는 향보다 더 좋습니다.


오늘은 Saturn Tin 뚜껑을 열고 찻잎을 한 꼬집 덜어내는 순간, 할아버지 곰방대 담뱃잎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찻잎의 모양과 담뱃잎의 모양새가 비슷하여 기억의 오버랩이 된 모양 샙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님께서 세상을 달리하셨으니 40년도 넘은 기억입니다. 한 집에 3대가 같이 살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3대 독자인지라 애지중지하셨습니다. 오늘처럼 날이 추워지면 매년 시장에 나가 인삼을 사 오셔서 꿀과 함께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웬만한 잔병치레는 한 적이 없이 컸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담배를 곰방대에 피우셨습니다. 긴 곰방대 끝에 담뱃잎을 잘게 썰어서 넣고 손으로 꾹꾹 누릅니다. 그리곤 성냥불을 붙여 길게 연기를 빱니다. 곰방대 담배연기의 아련한 향이 아직도 코끝에 남아있는 듯합니다. 담배연기가 싫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는 담배를 아예 배우 지를 못해 아직 담배연기를 목으로 넘겨본 적이 없습니다. 투르키에 물담배를 피워보느라 연기를 넘겨보긴 했습니다. 물담배는 깊게 복식호흡으로 빨지 않으면 연기가 넘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담배연기가 크게 싫지는 않았지만 제 인생과 크게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대학시절 문무대와 휴전선 철책근무 입소를 하던 때조차 쉬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는 것 밖에는 소일거리가 없었지만 체질에 맞지 않았습니다. 남들 다 피우는 틈에 끼어 몇 모금 뻐끔담배로 피워보았지만 입술만 갈라지는 것 같아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 이후로 담배는 저의 인생에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지만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건물 내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이상할 정도지만 이 시절이 오래된 것도 아닙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무실에서 선배들이 담배를 뻑뻑 피웠습니다. 심지어 항공기 안에서도 담배를 피웠는데 국내 항공사들은 90년대 중반부터 금연을 선언했습니다. 항공기 비상구 앞과 맨 뒤로 가서 담배를 피우던 모습들이 생생합니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 이유는 담배 피우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유연하게 풀어가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제가 피우지는 않지만 담배 한 대 권하면서 이야기의 단초를 시작하곤 했습니다.


잎담배 이야기를 쓰다 보니 90년대 초반, 제가 모시던 부서장께서 사무실에서 맥아더 장군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담배 파이프에 시거향이 나는 잎담배를 넣어 피시던 기억이 납니다. 시거 잎담배는 향이 엄청 진해서 아침에 한 곰방대 피시면 20층 건물 전체에 시거향이 납니다. 원성이 자자해서 그런지 몇 달 못 가서 끊으셨습니다.

지금은 담배 피우는 사람이 오히려 숨어서 피워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흡연 구역이 대부분 건물 뒤편에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담배 피우러 나간다고 하면 안쓰러운 마음도 듭니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가는데 굳이 피워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담배를 안 피우거나 못 피우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일 겁니다.


제가 아침에 차를 한잔 마시는 거나 누군가 담배 한 대 말아 피는 것이나 다를 수 없습니다. 같은 루틴이지만 도구만 다를 뿐일 겁니다. 다만 담배 연기가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해악성이 주홍글씨처럼 따라붙어 있고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되기에 경계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긴장감을 완화하고 집중을 강화하는 도구로 담배가 사용되고 효과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겠고 백해무익한 것으로 인식하고 회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연기조차 피해야 하는 물건일 수 있습니다. 냄새가 나지 않는 액상담배도 등장하여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숫자가 줄지 않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럼에도 담배를 피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끊어보려고 시도를 하던지, 횟수를 줄여보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피워봐도 별 신통치 않다고 느끼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니코틴 중독이라고 스스로를 학대하며 계속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무언가를 끊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매일 하던 루틴 중의 하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충격적인 사건과 접하기 전해는 중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소대로 해도 별 문제가 없었고 신체에 어떤 변화도 못 느끼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역치의 순간을 넘어서는 순간,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중독이 무서운 이유입니다. 역치의 순간을 모르게 하거나 아무 문제없다고 세뇌시키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피우신다면 웬만하면 이제 끊으시는 게 어떠신가요?" 개인 취향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권유하기에는 부적절할 수 있으나 그래도 주위를 둘러보면 담배를 피워서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담배 대신 다른 루틴을 하나 찾아보는 것도 방법일 듯합니다. 물론 니코틴보다 더 뛰어난 효과를 볼 수 있는 도구 찾기가 쉽지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


찻잎 덜다가 금연 이야기까지 어어져 왔네요. 이 놈의 늘려 쓰기 수법이 드러나는 것 같아 그만 줄여야겠습니다. 차 한 잔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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