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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r 13. 2023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숨구멍'

일요일인 어제저녁 7시 조금 지나 식사를 하고, 역시나 거실 소파에 반쯤 누운 상태에서 TV 리모컨을 괴롭히고 있다. 집에서 거실 TV를 보는 유일한 사람이 된 지 오래됐다. 아이들은 아예 거실의 TV를 보지 않는다. 휴대폰과 각자 방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로 모든 걸 해결하는 세대다 보니 이해가 간다. 그나마 와이프는 몇몇 드라마 시간에만 채널 소유권을 주장할 정도이고 나머지 시간은 태블릿으로 본다.


집안의 가장에 대한 가족들의 배려가 몸에 밴듯하다. 직업상 뉴스를 챙겨보는 습관이 온 가족의 TV 시청 패턴까지도 변형을 시켜버렸다. TV를 보는 성향과 패턴, 선호 영상들이 다 달라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나는 뉴스시간을 본방사수를 해야 하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아침저녁으로 메인 채널에서 하는 뉴스시간에는 거의 자동으로 채널고정을 하게 된다. 나이 든 꼰대여서도 아니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꼭 알 필요가 있어서 보는 건 아니다. 직업이 홍보맨이다 보니 무의식 중에 뉴스모니터링을 하는 직업병 같은 거다. 그렇다고 뉴스전문채널을 틀어놓고 보지는 않는다.


주중에는 4 식구가 모여 같이 식사를 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 보니 그나마 주말에나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같이할 때가 있다. 지금은 큰 딸아이가 비행 스케줄에 따라 근무를 하니 이조차도 점점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어쩌다 온 식구가 거실에 모여 있으면 TV 채널은 4명이 모두 볼 수 있는 교양 프로그램에 맞춰지게 된다. 그래서 주로 KBS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같이 보게 되고 이어서 MBC에서 하는 '출발비디오여행'과 같은 영화소개 프로그램들로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EBS의 '세계테마기행'도 주로 같이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다. 여행 관련 프로그램은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기능도 하지만 가봤던 해외지역이 화면에 나왔을 때 예전 기억을 되살리는 가족 대화 회상용으로 제격이다.


하지만 이런 교양 프로그램 시청도 식사시간 잠깐 뿐이다. 식사가 끝나면 다들 설거지다 청소다 하고 각자 자기들의 공간으로 들어가거나 외출준비를 한다. 거실에는 나 혼자만이 공허하게 리모컨을 들고 앉아있는 경우가 늘어난다. 특히나 아이들이 사회로 진출해 직장을 다니고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4 식구가 같이 모이려면 사전에 일정을 맞춰야 할 지경이 됐다. 한집에 같이 사니 4 식구가 항시 같이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 집은 일단 큰 딸아이 근무 스케줄에 맞춰 식사시간이 정해진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주도권 쉬프트 현상이다.


어제저녁도 자연스럽게 혼자 거실에서 채널을 돌리던 중 우연히 MBC에서 하는 '물 건너온 아빠들'이라는 오락프로그램에 리모컨 손가락이 멈췄다. 패널로 소통전문가 김창옥 씨가 나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김창옥 씨의 달변이야 자타가 공인하는지라 잠시 무슨 대화를 하나 궁금해 채널 서핑을 멈췄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와이프와 대화의 오해에서 발생하는 고민거리들에 대한 눈치싸움에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대목에서 "참 달변가가 따로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옥 씨 왈 "부부사이에도 숨구멍이 필요하다'는 조언이었다. 살면서 숨구멍은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 같은 거는 하나쯤 있어서 그것을 하며 즐거워하고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해녀가 바다밑으로 내려가 소라 전복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숨을 참아야 하는데 숨을 참기 위해서는 숨을 제대로 쉴 줄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라고 한다. 적절한 비유는 상황을 한 방에 이해하게 한다. 소통전문가다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나의 숨구멍은 어디 어디에 뚫어 놓았지?" 되돌아본다. 일상을 잠시 놓아놓고 할 수 있고 해 볼 수 있는 게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세어본다. 피트니스센터에 다니며 운동하는 것도 나의 체력 유지를 위한 숨구멍이고 가끔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일, 골프를 치는 일, 가끔 여행을 가는 일, 자연과학 공부를 하는 일, 이렇게 브런치에 매일 글을 쓰는 일,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떠올려보니 마땅히 더 생각나는 것이 없다. 한 가지 취미생활만 가지고도 일상의 스트레스를 털어낼 수 있겠지만 상황 상황에 따라 감정 및 조건들이 달라질 테니 '숨구멍'은 여러 개가 있는 게 좋을듯한데 숨구멍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육상 포유류였다가 바다로 돌아간 고래는 최대 2시간여를 숨을 참을 수 있고 바다사자는 20분 정도, 바다코끼리는 10분 정도 숨을 참을 수 있다. 인간이야 세계 신기록 보유자가 24분을 참았다고는 하지만 보통은 2-3분조차도 참아내기 힘들다. 그다음에는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어야 한다. 얼어붙은 북극해의 한가운데에도 이들이 숨을 쉬는 얼음 구멍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북극해의 얼음 숨구멍은 이들이 계속 숨을 쉬느라 번갈아 올라옴으로써 얼지 않게 된 공간이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다면 얼어붙은 북극해에는 숨구멍이 있다. 생명은 그렇게 니치(niche) 공간에 마코프 블랭킷(Markov Blanket)의 경계를 만들어 생존하는 현상이다.


숨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한다. 신경 써서 보수해야 하고 심지어는 북극곰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감추어 두어야 한다. 숨 쉬러 올라오거나, 숨 쉬며 쉬고 싶을 때 심신이 안정되고 편안한 장소나 취미가 있어야 한다. 심지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자신만의 숨겨둔 숨구멍이 있어야 한다. 그 숨구멍은 나만의 아지트인 카페일 수도 있고 나만의 노래일 수도 있고 나만의 사람일 수 도 있다. 크게 심호흡할 수 있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숨구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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