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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19. 2023

전철 막차, 객실 풍경

집으로 가는 마지막 전철이나 버스를 타 본 적이 있으신가요? 요즘은 심야버스도 있고 해서 막차라는 개념이 조금 생뚱맞기는 하지만 그날 종점으로 운행하는 마지막 교통편이라는 의미에서 서민들에게는 중요한 방점 역할을 합니다.


어제저녁, 이 전철 막차를 탈 일이 있었습니다.


25년 전 제가 근무하는 부서에서 팀장으로 모셨던 선배님의 부친상이라 조문을 갔습니다. 일산입니다. 제가 사는 중랑구 신내동과는 방향이 완전 반대입니다. 차를 가지고 갈까 하다가 마침 일산 쪽에 사는 예전 동료와 함께 가기로 해서 퇴근 후에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근처에 전철도 한번 갈아타면 집에까지 갈 수 있어 흔쾌히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세상을 작별하는 사람은 항상 그렇지만 대부분 예고 없이 출발을 통보합니다. 어제도 마찬가지인지라 다른 약속 모임에 양해를 구하고 빈소로 향했습니다. 가기 전에 마침 일산에 사는 가까운 지인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일산에 있는 병원에 조문 가는데 저녁 퇴근 후에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했습니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못 만났는데 조문을 핑계 삼아 만나기로 합니다. 겸사겸사 일산에 사는 지인들도 모아보겠다고 합니다. 일이 커질듯한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일단 그러자고 했습니다.


빈소에 들러 조문을 하고 식당에 앉아 상주와 예전 동료와 오래전 근무 당시의 여러 에피소드들을 쏟아냅니다. 빈소에서 웃으면 실례가 됨에도 불구하고 옛날 추억으로 화기애애해집니다. 유족을 애도하고 위로하러 왔다기보다는 회사 야유회 온듯한 분위기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2시간 반의 시간이 후딱 지나갑니다. 시간을 잊고 있는 사이, 만나자고 한 지인들이 병원 앞에까지 출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2차 저녁식사 자리가 또 마련되었습니다. 장례식장 식당에서 조금 먹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반 앉아있는 사이 식사도 하고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집어먹어서 배도 부르지만 어쩔 수 없이 지인들과 또 먹게 됩니다. 다행히 일식집에 예약을 해 놓은 덕에 회 몇 점 집어 먹고 건배하는 술을 마시는 것으로 부른 배를 달랬습니다.


문제는 다들 갑자기 번개로 모였음에도 오랜만에 만난 탓에 술잔 도는 횟수가 빨라집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식당 마감시간도 10시로 예고된 탓에 다소 조급해진 듯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쉬운지 2차를 가잡니다. 자기들은 집이 일산이니 상관없지만 나는 집도 먼데 ㅠㅠ


집이 멀어 그냥 간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호출해서 모인 식사자리인데 혼자 도망가듯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2차 맥주집으로 옮겼습니다. 저는 3차입니다. ㅠㅠ

이제부터는 온 신경이 전철 언제 끊기나로 옮겨집니다. 11시 36분 전철이 마지막으로 서울로 갑니다. 경의중앙선 막차 시간이 그렇습니다. 대곡역에서 한번 갈아타야 하고 그 전철의 종점은 청량리까지입니다. 이런 ㅠㅠ 잠시 망설여집니다. 전철을 탈까 말까 말입니다. 시간이 애매하면 택시 호출해서 가면 되지 뭐 이러고 있는데 시계를 계속 보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운지 아쉽지만 다음에 또 보기로 하고 먼저 가랍니다. 자기들은 더 있겠다고 합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자기들도 자주 못 만나는데 오늘 뽕을 뽑겠다고 합니다.


막차 핑계 삼아 식당을 나와 택시를 탈까 하다가 그냥 전철역으로 향합니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고 해서 오랜만에 전철 막차를 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전철 막차에 올랐습니다.


막차의 차내 풍경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막차에는 보통 승객이 꽉 차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승객들은 거나하게 술에 취한 모습입니다. 전철 출입문이 열리는 순간 차 안에서 풍겨오는 술냄새와 삼겹살 고기 구워 먹고 옷에 밴 냄새, 심지어 가끔은 홍어 먹고 탄 사람의 향기까지 코를 찌르기도 합니다. 막걸리 트림한 냄새가 섞여 올 때도 있습니다. 술 취한 동료끼리 주고받는 대화 톤이 높아 전철 안은 시끌시끌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예전 전철 막차의 객실 풍경입니다.


그런데 어제 마지막 전철 안의 풍경은 정말 생경했습니다. 물론 노선이 어디냐에 따라 다릅니다. 서울시내 상권을 지나는 경로였다면 위의 모습들도 섞여 있겠지만 어제 전철은 일산에서 용산을 돌아 왕십리, 청량리까지 가는 노선이라 술집 밀집 지역을 지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청량리까지 오는 1시간여 동안 차내가 조용합니다. 듬성듬성 앉은 승객들도 모두 젊은 층입니다. 늦은 근무로 피곤에 찌든 노동자나 중년 이상의 나이 든 어르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철 막차 객실의 분위기가 이렇게 많이 바뀌었음을 보게 됩니다. 제가 타고 있는 객차에 술 취해 눈감고 잠을 자는 승객은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졸다가 내릴 곳을 지나치면 낭패임을 알아서 그럴까요?


코로나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모임의 형태가 완전히 바뀌었고 그 모습은 이렇게 전철이나 버스의 막차 풍경까지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합니다. 경제가 안 돈다고 볼맨소리를 할 수 도 있겠지만 그래도 일찍 일찍 귀가하는 건전한 문화로의 진화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덕분에 청량리에서 내려 다시 택시 타고 집에 도착하니 12시 50분입니다. 조문 갔다가 일타쌍피로 사람 만나고 돌아오려던 계획이 일상 루틴을 살짝 벗어나게 했지만 그래도 마음 훈훈한 온기를 느끼고 돌아온 시간이었습니다. 이 아침이 조금 피곤한 듯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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