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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07. 2023

황당함을 허용하라

"나는 지금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 생각은 옳다. 법 없이도 산다."


과연 그럴까?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고 확신을 갖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태극기부대 사람들과 탄핵을 외치는 사람들 중 어느 부류가 더 합리적인가? 그것도 아니면, 양 극단에 싫증 나서 중간 길을 고수하는 부류가 더 합리적인가?


합리성(合理性 ; rationality)은 "어떤 생각이나 주장이 타당한 근거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상태로 객관화할 수 있는 증거를 수반하여 신뢰할 수 있는 주장이나 판단"을 말한다. 합리적인 판단이나 주장을 근거로 내세우면 모두가 맞고 올바른 정치색이 된다. 정치성향에 합리성을 들이대고 옳고 그름의 잣대를 재는 것은 오류를 낳는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두가 옳은 것이 합리성인데 각자의 주장은 각자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합리성이 가진 모순이다. 역설과 모순이 얽혀있는 상태. 그것이 인간이 모여있는 사회를 바로 볼 수 있는 기본형이다. 사회도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기 때문이다. 생명이 끊임없이 균형점을 찾아가는 천칭의 움직임인 것처럼 사회도 양립되는 팩트가 양 기둥으로 세워져 굴러간다. 자동과 구성, 안전과 유연, 속도와 정확, 추상과 구체 등 상호 반비례 관계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인다. 어느 한쪽이 비대하게 커져 가면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난다. 사회도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한, 인간의 구성집단이기에 그렇다.


자기 것만 주장하고, 자기 것만 들이대서는 곤란하다. 내 것도 옳겠지만 타인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는 심리를 바닥에 깔아야 한다. 그래야 편해진다. 나는 옳은데 상대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심사가 편치 못해 진다. 어떻게든 상대를 설득하고 싶어지고 더 나가면 외면하고 싶어지고 그 보다 더 나가면 때려주고 싶어 진다. 분노하고 성질내는 놈이 하수다. 헛수고하는 것이다. 성질내고 화낸다는 것은 나의 에너지를 쓰는 일이다. 정치색을 가지고 성질내고 화내는 놈이 최고의 하수였던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한 수 접고 상대를 들여다보는 게 삶을 쉽게 사는 방법이다. 일단 뭐가 되었든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럴 수 도 있구나, 얘기해 봐 들어줄게!"라고 다가서면 된다.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 어떻게 자기의 일상과 거의 관계도 없는데 시간과 휴일을 반납하고 추운 길바닥에 피켓 들고 앉아 목청 높일 수 있지? 저 사람들은 왜 저렇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의 생각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고 성질 더러운 놈도 만나고 격정적인 논객의 말도 안 되는 주장도 들어봐야 한다. 괜히 시간 버리고 오히려 열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들의 침 튀기는 주장을 들어보면 자신의 확증편향이 강화되고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나의 브레인 유연성을 넓히는데 활용하라는 것이다. 나의 논리를 강화하는데 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고 미사여구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심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황당한 주장을 들어야 한다. 자기의 심지가 약하거나 부족하면 홀라당 상대에게 넘어가고 만다. 상대의 주장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내 지식의 바다가 넓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받아들이고 융합해 낼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내 지식의 바다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덤벼들었다가는 오히려 뚝이 터지고 만신창이가 될 수 있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깨닫는 일, 그것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창을 하나 더 뚫게 되는 기본이 된다. 뭐가 뭔지 모르면, 봐도 뭐가 진짜인지 모르고 지나간다.


나의 성을 견고히 쌓아놓고 타인의 성을 들여다봐야 어떻게 성을 쌓았는지 비교할 수 있다. 그때서야 뭐가 부족했는지, 논리는 뭐가 약했는지 간파할 수 있다.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활을 쏴도 되는지, 총정도로도 제압할 수 있는지, 아니면 대포가 필요한지도 알 수 있다. 상대의 주장이 황당하게 들릴수록 나의 성을 더 굳건히 쌓을 훌륭한 벽돌이 될 수 있음을 알면 오히려 황당함이 재미있게 들리고 재미있게 보인다. " 그 사람들 재미있구먼!"이라고 한마디 던지면 다 이해가 된다. 그렇게 더불어 살게 된다. 그게 사회다. 별거 없다. 당신이 없으면 나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일단 상대를 인정하고 나면 나머지들은 어떻게든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적과의 동침도 가능해지고 공동의 적을 같이 만들어 머리를 맞댈 수 도 있게 된다. 고마워해야 한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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