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May 25. 2020

'지금 이 순간, 이 시간' 살아있음이 제일 중요하다

오늘 아침도 자신과의 한 달간 약속을 위해 10Km 조깅을 나섭니다. 뛰면서 무엇을 위한 약속인지 되뇌어봅니다. 건강을 위한 것인가? 건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병들어 시름시름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활발히 하는 수준을 건강이라 하는가? 내일을 위한 준비를 위해 지금 조깅을 하고 건강을 생각하는가? 툭 튀어나온 똥배를 집어넣기 위한 수단으로 조깅을 하는 것인가? 똥배는 왜 집어넣어야 하는가? 몸매를 위해서? 이 나이에 몸매라니? 그럼 무엇을 위해 이 새벽을 달리고 있는 것인가?


숨을 헐떡이며 뛰다가 잠시 걷습니다. 무엇을 위해 뛰고 걷는지 목적의식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쉽게 잡히지를 않습니다. 체중을 늘리지 않겠다는 것이 목표가 되긴 하겠지만 글쎄요? 그러다 불현듯 건강과 똥배와 내일은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임을 알아챕니다.


지금 이 시간 뛰면서 보이는 아카시아꽃과 그 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달콤한 향과 연초록이 진초록으로 바뀌는 산의 색깔을 보고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입니다. 지금 뛰고 있는 것은 내일을 위한 것도 건강을 위한 것도 똥배를 집어넣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순간 내가 뛰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 더 소중함을 말입니다.


그렇게 "지금 이 시간과 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 호흡 하나하나가 폐 속에 들어와 박힙니다. 내딛는 다리 근육의 미토콘드리아가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는 여유도 생깁니다. 호흡도 안정됩니다. 그러면 눈에 들어오는 자연의 색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녹음이 우거진 가로수 사이를 뛰며 초록빛을 넘어 이젠 짙푸름으로 가는 현상을 보면서 식물의 세계에 인간이 세 들어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빛 에너지를 스스로 합성하는 식물에 비해, 다른 생물이 만들어놓은 에너지를 갈취하는 사피엔스의 진화 또한 고효율의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진화하다 보니 빚어진 결과입니다.


과연 어느 방법이 더 우수한 진화일까 되짚어 보면, 글쎄요 스스로 에너지를 만드는 녀석이 더 훌륭하지 않나 싶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똑같이 빛 에너지를 활용하는 생물입니다. 다만 같은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방법만 달랐을 뿐 근본 기재는 똑같습니다. 지구 상 모든 생명체가 같은 존귀함 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식물의 이파리가 모두 초록인 이유는 빛의 스펙트럼중 초록색 만을 잎이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파랑과 빨강, 원적외선까지는 흡수하여 에너지 대사로 사용하지만 초록 파장은 잎에 흡수가 안돼 반사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모든 식물이 초록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눈은 파랑과 초록, 빨강 3 원색만을 인지합니다. 이 3가지 색깔만으로 총천연색을 인지합니다. 3가지 색이 모두 합쳐지면 흰색으로 봅니다. 인간이 눈으로 인식하는 색깔 중 빨간색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 시작한 때부터입니다. 그래서 빛의 파장 중 가장 주파수가 긴 빨강은 초록 주파수 옆에 위치합니다. 빨강과 초록을 구분하지 못하는 적록색맹은 그래서 아주 빈번히 등장하는 것입니다.


절세의 화가 고흐가 황색증을 앓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이에 더해 색맹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지배적입니다. 고흐의 그림을 적록색맹인 사람이 보면 바로 녹색과 적색을 구분 못하고 노란색을 지배적으로 보는 것과 똑같은 색을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체적 핸디캡으로 그려낸 그림을 보고 후세의 호사가들은 고흐의 그림에서 색을 해석해내는 탁월한 안목이 있다고 확대 해석한 것이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물론 신체적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훌륭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아침, 녹음의 짙음을 더해 그늘도 더욱 짙게 만드는 나무 사이를 뛰면서 삶의 지혜를 엿보게 됩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조차 한 곳에 뿌리내리고 평생을 사는 식물의 지혜로 인한 현상임을 말입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면 아마 그 언젠가 부러지고 갈라져 지금은 보지 못하는 대지의 원소로 흩어져버렸을 테니까요.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모든 것에 경배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