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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Nov 11. 2017

그해 가을,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밤9시의커피] 빨간 커피 열매의 매혹에 대하여, 그리고 랭보에 대하여

(앞선 글 <그해 여름, 하얀 커피 꽃의 아름다움에 대하여>에서 이어집니다. 11월 10일, '견자(見者)'이고 싶었던 천재 시인에서 커피 상인으로, 무기상으로 변신했던 아르튀르 랭보의 기일을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Elle est retrouvée.

Quoi? - L'Éternité.

C'est la mer allée

Avec le soleil.

그것을 다시 찾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푸른 바다에

녹아드는 붉은 태양

_ 랭보 「영원」(L'Éternité)(1872) 중에서


저 멀리 커피 산지에서 만난 하얀 커피 꽃.

그 꽃은 그녀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별이 되었다. 하얀 별빛 아래 키스는 달콤했다. 그리고 우리는 하얀 커피 꽃이 잉태한 빨간 커피 열매를 만났다. 하얀 꽃이 작은 초록의 열매로 변하더니 차츰 빨갛게 익어갔다. 우리 사랑도 그러했다. 하얗게 시작한 사랑은 초록을 건너 빨갛게 타올랐다. 계절의 변화와 다르지 않았다. 가을을 수놓는 빨간 단풍처럼 빨간 커피 열매는 우리 마음을 수놓았다. 이 빨간 열매는 염소(커피의 유래에 대한 ‘칼디의 전설’에 나온다)를 춤추게 했다. 우리라고 염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빨갛게 물든 내 마음은 한편의 詩를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10일, 우리 사랑을 내가 볶은 특별한 커피로 표현해주고 싶었다. 스페셜티가 따로 있나. 우리 눈으로 만나고 따고 건조하고 추출한 커피는 하나의 서정이자 한편의 詩였다. 물론 특별히 그날을 고른 이유가 있었다. 11월 10일(1891년), 세상에 작별을 고한 랭보 때문이었다.

그렇다.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 토탈 이클립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


그녀는 詩를 좋아했다. 세상 모든 시인에게 애정을 보냈다. 높디높은 1004m 커피 산지는 詩想이 절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그녀는 별이 쏟아지는 밤, 종종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詩를 건네곤 했다. 나는 그 詩를 타고 훨훨 날아올랐다. 詩들은 하늘 곳곳에 자리매김했고 그 詩는 다시 커피나무를 키웠다. 하얀 커피 꽃과 빨간 커피 열매에 詩가 알알이 박혔다.


랭보가 가을도, 겨울도 아닌 어정쩡한 계절, 방랑이 질퍽댈 것 같은 11월에 세상과 절연한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겠다. 그것은 외로움과 세상과의 불화 때문이었으리라. 젊은 시인들에게 ‘詩王’이라 불렸던 폴 베를렌과의 격정적인 연애를 끝내고 세상에 삼투압 하지 못한 천재가 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카드. 너무 일찍 세상을 안 탓에 시큰둥해져 버린 생. 더디 가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의 예술적 탐험은 조금이라도 더 가능했을까.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궁금했다.


랭보, 커피를 만나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내가 준비한 커피 이름은 ‘바람구두’였다.

1891년 11월 10일, 서른일곱이었다. 요절. 죽기 몇 달 전, 병 때문에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그는 이렇게 거침없이 내질렀다.


“우리 인생은 불행이다. 끝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빌어먹을, 이 말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번번이 실패하고 자주 불행하다. 끝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꾸역꾸역 버티고 견딘다. 아주 사소하고 엉뚱한 성공과 행복에 감읍한 덕분일 것이다. 랭보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일찍이 천재였던 그는 열다섯에 「고아들의 새해선물」을 내놨다. 빅토르 위고로부터 ‘어린 셰익스피어’라는 극찬도 받았다. 그는 베를렌을 흠모했고, 열일곱에 보낸 편지를 계기로 가까워졌고 또한 연인이 됐다. 그러나 2년 뒤 술에 취한 베를렌이 쏜 총에 랭보는 부상을 당했다. 파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끝으로 스무 살에 詩를 덜컥 놓았다. 5년여 100편에 가까운 詩를 세상에 내놓고 시인으로서 삶을 마감했다

 

그녀에게 랭보가 ‘스무 살 이전’의 詩로 각인됐다면 나는 랭보의 ‘스무 살 이후’가 궁금했다.


詩에 작별을 고하고, 랭보는 커피 상인(무역상)이자 무기상으로 살았다. 그는 왜 커피를 택했을까. 아니 커피가 그를 택한 것일까. 나는 커피와 랭보의 관계가 궁금했다. 당시 백인으로서 커피 무역상에 고용된 경우는 그가 처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에티오피아(당시 이름은 아비시니아)로 향했다. 그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 했고, 에티오피아를 택한 것은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우연히도 빨간 커피 열매가 처음 태어난 곳도 에티오피아다.


에티오피아에 간 랭보는 하라르로 향했다. 해발 1850m의 인구의 90%가 무슬림인 이슬람 도시. 이슬람 4대 성지 중 하나다. 1902년, 디레다와에 철로가 놓이기 전까지 세계로 향하는 유일한 무역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라르 커피에 대해선 이런 유언비어(?)가 있었다. ‘인도네시아 만델링 지역의 커피가 커피 왕이고, 에티오피아 하라르 지역 커피가 커피 여왕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디가 풍부하고 중간 정도의 산미에 초콜릿 향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달기엔 부족하다고 느낀다. 내 코와 혀는 그리 말한다. 개성이 다소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랭보는 어땠을까. 그는 하라르에 대해 “지저분하고 커피도 맛이 없는 곳”이라고 평했다. 그런데 그가 하라르 커피의 매력을 즐겼으며 자신만의 커피 가든을 가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 커피의 상태나 그의 컨디션 등에 따라 커피 향미가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 하라르 커피는 나쁘지 않다. 하라르 커피의 미묘한 밸런스는 예멘으로 전파됐고 그 유명한 ‘예멘 모카’를 잉태했다. 詩에는 능한 천재였던 그였지만 커피 감별에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되레 돈 감별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는 얘기도 있다.


랭보가 커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스물다섯 무렵이었다. 프랑스 무역회사 알프레드 앤 피에르 베르디의 커피밀에 중간 관리자로 일하게 됐다. 그는 인도 군인의 부인들을 고용해 커피 공장의 생산성을 높였다. 중간 관리자로서 좋은 평판을 받았다. 그 평판은 노동을 짜내서 회사의 이윤을 극대화한데 대한 것이다. 랭보는 詩에 작별을 고한 뒤 철저히 돈을 밝히는 속물로 살았다. 극과 극의 체험을 겪은 천재가 택할 수 있는 건 분열 혹은 죽음밖에 없지 않았을까?  

랭보로 분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토탈 이클립스> 스틸컷

하라르 커피에 섞인 랭보의 자취는 그래서 찐~하다. 터키의 속담, ‘커피는 지옥만큼 어둡고, 죽음만큼 강하고, 사랑만큼 달콤하다’는 하라르 커피를 지칭한 것이다. 랭보의 질척한 방랑이 섞여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11월 10일 준비한 특별한 커피, ‘바람구두’에 그녀는 만족한 듯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중2병’(중학교 2학년 나이 또래 청소년들이 겪는 허세적 착각)을 앓았을 무렵의 랭보를 추억해도 좋고, 더 이상 랭보에 빠질 수 없음을 아는 속물적 현실을 자각할 수도 있는 커피.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을 위하여


침상 주위에 헝클어진 것들은 흡사 상복 같은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의 북풍은 문간에서 탄식하고,

방안에 음산한 바람을 가득히 불어넣는다.

한 차례 휘둘러보기만 하여도 무엇이 부족한가를 누구나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두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사랑 가득한 미소로,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 어린이들 몸 위에 모피나 이불을 자상하게 덮어주는 일도 잊었단 말인가.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말한 다음, 떠나기 전에,

새벽녘의 추위로 어린아이들이 감기 들지 않도록

문을 꼭꼭 닫아주어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_아르튀르 랭보, 「고아들의 새해 선물」 중에서


그녀를 위한 커피 ‘바람구두’를 건네며 나는 랭보의 데뷔작을 함께 읊었다.

그녀는 이 詩가 우리 사회가 겪은 역사를 연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백성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인민은 늘 착취당했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나라는 백성보다 왕을 위해 존재했고, 권력자에게 인민은 호구였다. 나라에 위기에 닥치면 왕은 도망가기 바빴고, 권력을 잡은 자는 사익을 챙기느라 인민은 안중에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나라였다. 역사 속에서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을 하는 존재의 부재에 시달렸던 우리들이었다. 열다섯의 천재 시인의 눈에 비친, 어머니 없는 고아들의 시절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우리들이었다. 나라를 지탱하는 근간이자 주인임에도 우리는 이미 무간지옥에 빠져 있었다. 19세기, 다른 나라 시인이 쓴 詩로 이것을 새삼 확인한다.


랭보는 베를렌과 보낸 2년을 바탕으로 대표작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썼다. 베를렌은 이때를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이라고 회상했다. 형용모순이 빚어내는 아찔한 생의 기억.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는 베를렌이 랭보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부르주아와 물질만능의 부조리를 십 대에 깨닫고 이를 조롱하고 저주하며 시대를 거스르던 그는 그래서 모험가였다.


예술적 자유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랭보는 스물을 넘자 문학을 단념했고, 예술적 자아를 배신했다. 詩를 그토록 혐오하던 황금과 상품으로 바꿨다. 커피 상인 혹은 무기밀매상으로 남은 생을 채웠다. 그것이 ‘견자’로서의 또 다른 방랑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는 ‘돌아온 탕아’와 같은 레떼르를 거부했다. 서른일곱의 나이로 쓸쓸히 맞이한 죽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토탈 이클립스> 스틸컷

이 커피는 삶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마냥 보내다 요절한 바람구두를 닮았다. 빨간 커피 열매의 매혹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리곤 나는 그녀에게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고 말했다. 사랑의 매혹도 따라서 단 한번.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격정의 시절을 관통하면서 랭보에 매혹당할 순 있겠지만, 두 번은 없다. 랭보 역시 그러했으므로.


그래서 어쩌면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그녀.

붉었다. 내 마음도, 내 입술도, 우리 사랑도. 우리 눈앞에서 만난 커피 열매가 그러했듯. 시인 인양 나는, 그녀에게 오글거리는 멘트를 던졌다. 빨간 커피 열매에 나는 매혹당한 자였으므로.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의 죄악은 빛났습니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으로 내 인생은 충만했으니까.

그러니, 이 글을 만난 당신에게도 ‘가장 빛나는 죄악’ 하나쯤. 오늘만큼은.

그것이 커피여도 좋고, 다른 무엇이어도 좋고. 랭보를 떠올리며 빛나는 죄악 한 모금.

‘빛나는’이 부담스럽다면, 르 페셰 미뇽'(le péché mignon)’도 좋겠다. ‘작은 죄’ 혹은 ‘귀여운 죄’라는 뜻을 가진 이 프랑스어는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이라고 불렀던 베를렌의 표현에 대한 오마주라고 고집해본다.


그해 가을, 우리는 사랑이라는 죄악을 빛나게 저질렀다. 커피 열매가 빨간 이유를 알았다.


아, 나는 이제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삶 자체가 매우 피곤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피곤의 연속이며 기후 또한 참기 어렵습니다.

(…)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_랭보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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