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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주리 Dec 01. 2022

긴 생각 3

<시와 겨울>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코로나에 걸린 이후 나는 추위에 조금 민감해졌다. 아주 조금. 여전히 집에서는 헐렁하고 얇은 잠옷을 입고, 두껍지 않은 사계절 이불을 덮는다만... 밖을 나설 때는 덥게 느껴지더라도 패딩을 입고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게 되었다. 더우면 패딩을 벗으면 되니까. (겉옷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일 년 동안 장롱 속에 들어있던 패딩을 꺼내 입었는데, 주머니 속에 뭔가 있었다. 아무래도 지폐가 들어있다면 좋았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돈인 줄 알았는데 영수증이었던 적도 다반사다.) 묵직한 게 들어있어서 놀랐는데, 만져보니 소형 스테이플러였다.


내가 집에서 스테이플러를 사용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내가 쓴 시를 우편으로 부치려고 할 때. 다시 말해 신춘문예를 준비할 때다. 신춘문예 공모할 때가 되었겠구나 하고 떠올렸다가, 나가야 될 시간을 지나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급한 나머지 스테이플러를 주머니에 그대로 둔 채 문밖을 나섰는데, 돌아다니는 내내 신경 쓰였다. 주머니 속의 스테이플러를 쥐었다가, 놓았다가 어쩔 줄을 몰랐다. 패딩 안주머니에는 유성매직도 있었다. 우편봉투 겉에 이름을 쓰기 위해 챙겼던 거겠지. 그렇게 문구류들을 품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 뜨끈해진 스테이플러를 책상에 내려놓으면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내가 올해에 시를 몇 편이나 썼던가. 한 해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았던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시를 쓴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졌다. 시에 대한 내 마음이 너무 어중간해서다. 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인데, 그렇다고 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정말로 시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내 미지근한 마음을 보여주기가 민망해서였다. 그렇지만 "너 요즘 뭐하고 지내니" 하고 누가 물을 때, "돈 벌고 먹고살려고 디자인 배워요." 보다는 "시 쓰죠."라고 말하고 싶은 건 여전하다. 그 말을 할 때 내 표정은 어색하고, 착잡하고, 머쓱해 보이겠지.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고 싶다거나 하는 의도는 아니고... 그렇게라도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상기하고 싶어서다.


20대가 되고 나서 겨울에 신춘문예를 준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매번 벼락치기로 준비하면서 뭐가 진심이고 뭐가 사랑일까. 한 해 동안 쓴 시를 갈무리할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시는 매년 몇 편 되지도 않았다. 지난해 이미 낙방했던 작품들을 한숨과 함께 긁어모으기도 했다. 그러다 금세 5천 원어치 로또를 사들고 천운을 바라는 사람처럼 뜬금없는 설렘으로 뒤덮였다. 그러는가 하면 공모 기한도 한참 남았는데 조급해지거나,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당선이 될까 봐 덜컥 불안하거나, 별안간 무언가 충만한 의지로 가득 차거나, 당선이 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무기력함과 함께 슬퍼지기도 했다.


이건 신춘문예 공모 포기에 대한 신세한탄의 글일지도 모르겠다. 올해는 되겠지 하는 마음이 문득 비열하게 느껴졌다. 시를 엄청나게 많이 읽지도, 쓰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당선을 꿈꾸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알량하게 자존심 부리는 걸 수도 있겠지만, 요행으로 꿈을 이루기 싫다. 인정받지 못하는 시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처음으로 공모를 포기하려고 한다. 올해만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가 시를 가장 많이 썼던 해는 2014년. 무려 19살 때다. 50편 가까이 썼으니까 일주일에 한 편 꼴로 셈이다. 기록하여 저장한 시만 그만큼이고, 고3인데 중2병에 또 걸려서 오글거리는 글들도 십수 개는 썼을 거다. (내용을 굳이 떠올리싶지는 않다...) 입시 문학 과외를 했었기 때문에 많이 썼던 것도 있겠지. 처음 시를 썼던 이유는 어이없지만 소설을 쓰기엔 너무 늦어서였다. 입시 문학에선 시가 소설보다 경쟁률이 낮아서, 뒤늦게 글을 배우겠다고 하는 내게 남은 선택지가 시밖에 없었다. 시작은 얼떨결이었지만 그때 나는 분명히 시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친구들이 영단어를 외울 때 나는 국어 단어를 외웠고, 숙어를 따라 쓸 때는 시 구절을 따라 썼다. 소설보다 시가 재밌어졌고, 시를 정말 잘 쓰고 싶었다.


그런데도 내 본질적인 게으름은 변하지 않아서... 과외까지 잡았던 것 치고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숙제를 제대로 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창작 과제를 미루고 미루다가 과외 시작 직전에 겨우 써서 낸다거나, 도저히 못 쓰겠어서 대충 혼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정말 대충 혼나고 말았던 적도 있었다. 그 결과로 나는 입시에서 전부 실패했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다'는 최소한의 목표만을 이뤄, 공기 좋고 물 좋은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지.


그 이후로 지금까지 시를 쭉 써오고는 있지만, 19살의 '실패한 나'보다도 많은 시를 쓰지 못하는 건 너무 부끄러운 일 아닌가. 절대적인 양의 문제가 아니라 (양도 문제겠지만.), '열심히'의 기준으로 따졌을 때 나는 발전한 게 없다. 인생이 변화되는 분기점이 있다고 가정하고 따져본다면, 아마도 내게는 '그 순간에 열심히 했었다면'에서 파생되는 분기점이 가장 많을 것이다. 뭔가를 열심히, 정말 미친 듯이 한다는 건 어렵지만 정말 중요한 일일 텐데.


요즘 들어서 시를 쓰려고 할 때면 거대한 암벽을 마주한 기분이 든다. 산을 차근차근 등반하고, 정상에 올랐을 때의 쾌감이 어떻고, 그런 의미로 드는 비유가 아니라... 암벽이 내게 날아와 부딪히는 것만 같다. 창작을 하는데 지난한 과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시에 대한 압박감이 이상할 정도로 커지고 두려워져서 나는 언제부턴가 시를 피하게 됐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신있어하던 글이 시인데, 시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잘 쓰고 싶지만 잘 써지지 않아서, 막상 쓰더라도 이런 시를 쓰자니 안 쓰는 게 낫다고 되뇌게 되어서. 그래서 정말 민망하지만... 사실은 시를 쓰는 재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시를 재밌자고 쓰는 건 아니었다. 시는 일종의 각성이나, 어쩌면 자기최면의 수단이기도 했다. "난 너무 게을러서 너무 많은 걸 망쳤어. 이제는 좀 똑바로 살고 싶어."라는 주제의 시가 10편이 넘고,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주제의 시도 있고. 반면에 "우리 가족이 뭔가 잘못 먹고 단체로 장염에 걸렸어."라는 얼토당토 없는 내용의 시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나'를 조금 더 차분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쓴 시를 읽어보면 그때의 고민과 감정이 고스란히... 는 아니고 어렴풋이 떠오른다. 부지런하게 살고 싶었거나, 부끄럽지 않게, 떳떳하게 살고 싶었거나, 그냥 멋있어 보이고 싶었거나, 아니면 마냥 웃긴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의 조각들.


그래서 나는 다시 시를 쓰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내 열정을 불지펴서 내가 힘든지도 모르고 자꾸만 움직이게 만드는, 그런 만화 같은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들 시간과 노력을 연료로 불태워 살아가는 거겠지. 그래서 나는 맞물리는 톱니를 하나씩 만든다고 생각해본다. 작은 원인의 톱니들을 맞물려서 시를 쓴다는 거대한 결과가 굴러가도록. 우체국에서 누군가 내게 선뜻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라고 말해줬을 때, 괜스레 하루 종일 두근거렸던 것처럼 사소하고도 소중한 순간들을 먼저 떠올려본다. 올해의 이 씁쓸한 마음을 계기로 내가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시를 쓰지 않는다'를 '사유하지 않는다'로 생각해본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기록하지 않는 내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서도 있지만, 어떤 종류, 이유, 경로로라도 '글을 쓰면서 살고 싶은' 나의 발버둥이다. 기록하려면 생각해야 하고, 생각하다 보면 사유하겠지. 사유하지 않는 예술가는 없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아가서는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근사하잖아.


나는 핸드폰을 많이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나 역시 쇼츠 세대다. 집중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생각하는 게 귀찮고 불편해지고 있다. 사유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증거일까. 스스로 생각하고, 생각을 글로 쓰기 위해 머리를 굴려 골똘히 궁리하는 일, 종래에는 시를 쓰는 일. 쇼츠 세대가 어떻고, 그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사유를 하고 싶다. 그걸 위해 지금 이 순간 유튜브 쇼츠를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난 이미 발전 중인 걸지도 몰라. 난데없이 긍정을 가져본다. 날이 다시 더워질 때 즈음, 시를 재밌게 쓰고 있을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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