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 이야기... Part11
월요일 아침. 평소와 동일한 시간에 출근을 했다. 지난 금요일 오후 늦게 면팀장 공지가 된 탓에 여전히 나에게 업무협조 요청을 하거나, 결재를 원하는 내용의 메일이 많았다. 메일마다 조직책임자가 바뀌었음을 회신하면서 용책임 아니 용팀장에게 함께 전달했다. 오후가 되자 동기 녀석들 그리고 업무를 함께 했던 선후배들의 문자 또는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물었고, 그냥 그리 되었다는 간단한 답변을 했다. 주변에 듣는 귀가 많기도 했고, 미주왈 고주왈 떠드는 성격도 아니었다. 입사이래 처음으로 할 일이 없어 정시 퇴근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배들이 퇴근 시간에 맞춰 소주나 한 잔 하자며 찾아와 팔을 잡아끌었다.
찾아온 선배들은 대부분 팀장에서 물러났으나, 자신의 쓰임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팀원으로서 팀의 고문역할을 하고 있는 이거나, Task의 리더로서 어려운 과제를 숙제로 받은 이들이다. 맘의 상처가 벌어진 채로 아물지 않은 탓에, 이들의 식사제안이 행여나 자신의 입지에 나의 행보가 관련이 있을지 궁금해하는 처사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식견이 한 층 성장해서 이런 관점에서도 사람을 볼 수 있게 됨을 기뻐해야 할지? 상처받은 짐승처럼 경계심만 가득해진 마음 씀씀이를 걱정해야 할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는 유전적으로 술을 잘하지 못했다. 주량을 논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외모와 다르게 소주 한잔을 마시기 힘들었고, 20년간의 노력 끝에 컨디션이 좋은 날이나 소주 한 병을 겨우 마실 수 있게 되었다.(소주 도수가 낮아진 덕일 수도 있다.) 다만, 술자리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술안주로 나오는 음식들을 좋아해서 회식에 항상 참석했고, 행여 새벽까지 이어진 회식에서도 늘 마지막까지 남았었다.
선배들 손에 끌려간 석식자리는 곤혹스러웠다. 아직 자매사 전배에 대한 면접 결과를 통보받지 못한 상황이라 시원하게 회사를 탓하며 욕을 할 수도 없었다. 답답한 상황을 빗대어 시원하게 쏟아낼 욕지거리 말고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고, 행여나 말실수는 없어야 하기에 말을 아꼈다. 말없이 소주만 마시는 모습에 선배들의 질문이 잦아들었다. 선배들은 어깨를 토닥여 주는 걸로 위로를 대신했다. 본인들이 앞서 겪은 아픔이라 이해한다고 했다. 결국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다 귀가하기 위해 택시를 탔다. 지하철에서 술냄새 풍기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다는 개똥철학을 핑계 댔지만, 실은 지하철에서도 혹시나 선배들의 질문을 받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다음날 아침. Staff임원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김상무가 날 찾았다. CFO 직속임원인 터라, 잔뜩 경계를 하고 그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면팀장 이후 행보에 대해 물었다.
"이팀장, 내가 새로 전사 Task를 기획 중인 것이 있는데, 정해진 것이 없으면, 이팀장이 해 볼래?"
답변도 하기 전에 단전으로부터 화가 솟아 오름을 느꼈다. 팀장 자리를 내놓게 되었을 때, 옹상무를 말리지 않았음은 동의했다는 것이고, 실제로 역할이 있는 제안 인지? 동정차원의 배려인지? 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상무님, 죄송합니다. 회사가 제게 팀장을 그만두라 했습니다. 이는 지금 하고 있는 경영관리 업무를 잘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조치라 생각합니다. 하니, 저는 더 이상 관련분야 업무를 안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 꼭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닌 것 같은데,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
"먼저 물어봐 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 상무님 생각이 회사와 다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옹상무께 이야기한 것처럼, 전사전략에서 일하려고 합니다."
애써 감정을 눌러가며 답을 했지만, 표정은 숨겨지지 않은 것 같았다. 분위기는 어색해졌고, 김상무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아침. 경영기획팀장 시절, 옆팀 팀장이던 김팀장이 연락을 해 왔다. 선약이 없다면, 점심을 먹자고 했다. 장소는 회사 건물 내 식당 중 제법 비싼 곳이었다. 내가 신규 사업부로 이동한 후, 경영기획팀장이 두 번 더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팀장, 내가 보자 한 것은 김상무가 제안했던 Task 건이야"
"(면팀장 되었는데, 왜 자꾸 팀장이래....) 그 건은 이미 김상무 님께 답을 드렸는데..."
"내가 연말에 승진할 수도 있어서 성과가 필요한데, 그 성과를 이 Task에서 만들었으면 해서, 이팀장을 추천했어"
발직하고, 욕망을 숨기지 않는 대담스러운 답변에 당황스러웠다. 뻔뻔하기만 한 그가 밉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말하는 승진은 경영기획담당을 말하는 것인데, 어제 만난 김상무가 옮기거나 퇴사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타까웠다.
"4년간 상사도 바뀌고, 기획팀장도 여럿 바뀌었지만, 나는 계속 자리를 지켰어. 회사가 생각한 게 있지 않겠어? 올해는 승진하지 않을까 싶어."
"......."
"그래서 말인데, 이팀장이 내 밑에 와서 Task를 좀 해주면 안 될까?"
(밑에 들어오라고? 이 새끼가 돌았나? 이러려고 비싼 밥 사겠다고 한 거냐?)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는 진지했다.
내가 경영기획팀장 시절, 그는 두 살 어린 나를 경계했었다. 내가 신설 사업부로 발령이 났을 때, 고생하는 나를 보면서 밥을 사주고, 위로도 했었다. 위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감사했고, 동료애라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자기 객관화를 못하고, 누군가에 사탕발림에 넘어가 저리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 한심했다. 당연한 욕망일 수도 있는데, 삐뚤어진 내 맘엔 그가 못나 보였다.
"김형, 옹상무가 날 이리 밀어냈는데, Task를 하면, 다시 그 얼굴을 봐야 하잖아요. 김형이 잘 되는 것은 내 응원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다가 김형에게 화가 미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는 에둘러 표현한 나의 협박에 움찔했다. 다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았는지 그는 그동안 본인의 위상이 많이 달라진 점을 식사 내내 호소했다. 쟁쟁한 김상무가 갑자기 이동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자기밖에 대안이 없다며, 올해가 그때라고 했다. 참, 영민한 사람이었는데, 욕심에 판단이 흐려진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에 대한 연민으로 화를 억누르며, 가까스로 버텼다. 자기 밑에 와서 본인 승진을 위해 희생해 달라는 요청은 꽤나 수치스럽고, 모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행여나 연말에 그가 승진한다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야겠다고 최면을 걸어 화를 다시금 삭였다. 다행히, 음식은 만족스러웠고, 식사는 무탈하게 마쳤다.
목요일. 어제까지 삼일째 저녁 술자리가 계속되었다. 삼삼오오 사람을 바꾸어 가며, 저녁 약속을 강요당했다. 고맙긴 한데, 위로는 되지 않았다. 나를 알아주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정도랄까?
며칠연속 술자리가 있었던 탓인지, 몸과 머리가 찌뿌둥했다.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대고라도 일찍 귀가해야지라고 맘을 다졌다. 이제는 Plan B로 고려해 두었던 팀으로 자리를 옮겨야겠다는 부담이 생겼다. 이젠, 가끔 과거 히스토리를 묻는 용팀장에게 잠깐씩 답변을 해주는 일 외에는 딱히 일이 없었다. 넋 놓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부질없는 기다림 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일에 파묻혀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Linked-in 등 이직을 위한 App도 옵션에 넣기로 다짐했다. 다만, 팀을 옮기기 전에 휴가를 내어 생각정리도 하면서 그때 등록하기로 했다.
퇴근 무렵, 전화가 왔다. 다행히 선배들이 아닌 인사팀이었다. 어쩌면 P사 면접 결과 통보 일수도 있기에 긴장한 채로 상대방 목소리에 집중했다.
"P사 현황을 업데이트(Update) 해 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면접관 3명 중에 CFO, K사업부장께서는 'OK'를 하셨는데, 아직 CHO의 승인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만장일치가 되어야 했던가요?"
"그게 아니라, 전에 말씀드렸던, 전임자의 거취가 아직도 논의 중이라 최종 통보를 못한다고, 양해를 구한다고 합니다."
"혹시, 불합격 이란 말을 돌려하는 건가요?"
“그…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인사팀의 말은 이러했다. P사는 합격도 불합격도 아직 통보해 주지 않았고, 내부 현황을 공유할 뿐이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합격통보가 아닌 이상 기다림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니었다. 자꾸 전화를 걸어 채근할 필요가 없을 뿐, 잊고 지내던가? 적극적인 이직을 추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 내가 결정해야 하는 선택은 팀을 지금 옮길 것인가? 조금 더 있다가 옮길 것인가? 가 아닐까?
일단, 한 주 더 기다렸다 팀을 옮기기로 마음을 정했다. 일전에 이동을 희망했고, 흔쾌히 받아주겠노라 했던 해당팀장을 만났다. 그분께는 사실을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회사 추천으로 P사 면접을 봤고, 회신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데, 들려오는 소식은 상당히 이상하다는 점 모두를 털어놓았다. 해서 다음 주까지 더 기다려 본 연후에 팀을 옮기겠다고 했다. 이동 전에 휴가를 일주일 정도 내고 싶다고, 그래서 팀에는 2주 후에 갈 것 같다고…
그는 팀에 희망퇴직으로 결원이 생기긴 했으나, 2주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업무인계 잘 마무리하고, 와서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생각 정리도 필요할 거라고 했다. 여전히 따뜻하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와의 대화를 마치니,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시간에 맞춰 PC를 종료하고, 잉여롭게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