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 이야기... Part 12
어제는 모처럼 정시에 퇴근했고, 바로 귀가를 했다. 오랜만에 집밥도 먹었다. 저녁 식사 후, 옷방 겸 서재에서 미뤄두었던 영화를 세편이나 보았다. 기다리던 영화가 개봉하면 극장에 가서 보곤 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집에서 시청을 하는 것에도 감사해하는 일상이 되었다.
팀장이 되고부터인가? 날이 곤두선 채로 일을 했다.
Staff팀장 12명 중 거의 막내면서 전사 경영기획팀장이 된 탓에 인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주말에도 메일에 바로 응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늘 PC를 들고 퇴근했고, 식사를 하다가도 회신했다. 이러다가 제명에 못 죽겠다 싶어 나에게 허용된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를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수면 시간. 하루에 6시간은 자야지 하는 생각을 품고 있다가 그렇지 못한 날이 오면 짜증을 내곤 했는데, 이게 다 부질없다고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하나 줄었다. 잘 수 있을 때 자면 되지 뭐, 잠 몇 시간 못 잔 게 대수라고... 일이나 빨리 마무리하지 뭐 이렇게... 그다음엔 식사를... 바쁜데 하루 세끼 다 먹을 수 있나? 굶으면 건강에도 좋다잖아.... 그때부터였을까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 패턴 그리고 운동부족 탓에 살이 쪘다. 첨엔 보기 좋은 정도였지만, 어느덧 펑퍼짐한 동네 아저씨 같아졌다. 해마다 받는 종합건강검진 결과서에 이상 소견이 늘고,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모처럼 잉여로운 저녁을 보내고, 출근을 했다. 더 이상 옹상무는 날 찾지 않았다. 팀원들도 신임 팀장과 이야기할 뿐, 어느 한 놈 가까이 오지 않았다. 존경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시선조차 두지 않는 행동에 몇 달간의 행보가 누굴 위한 것이었는지 부질없이 느껴졌다. 적어도 너희들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임 팀장이 옹상무와 돈독한 사이라는 사실은 밀려난 전임팀장과의 일말의 미련이 미움을 살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했을 터다. 나 역시 더 이상 미련은 부질없음을 인정하고 또 다른 스트레스를 만들지 말고 얼마일지 모를 여유를 즐기자 마음먹었다. 지인들과 여유로운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인사팀이었다.
"네, 팀장님. 식사하셨어요? P사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습니다."
"아, 그래요? 뭐라고 하던가요?"
"연락이 지연되어 미안하다고 했고, 담주부터 출근 가능한지 묻는데요?"
"합격인가요?"
"네, 합격이랍니다. P사 내부적으로 전임자 거취가 이제야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인수인계 절차 진행 때문에 차주 초에 출근했으면 하신다고 합니다."
다행이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P사는 아직 내가 면팀장인지 모를 수도 있는 상황인데, 바로 출근하라는 상식적이지 않은 통보에 화가 났다. 또한 시간이 지연된 것이 정말 후임자에 거취가 이슈였는지? 아님,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면접을 보느라 시간을 끌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옮긴다 해도 20년 생활을 정리하는데 지인들과 작별인사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을 포기할 수도 있는 옵션이 남아 있었다.
"음.. 최 과장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20년을 넘게 다닌 회사인데, 인사는 해야 하잖아요. 서울에만 지인이 계신 것도 아니고, 공장에 계신 분들한테도 인사해야 하고..... P사에는 회신이 늦어 불합격인 줄 알고, 이동 준비를 안 하고 있었으니, 후임 팀장 선발 및 인수인계할 시간을 달라고 문의해 주세요."
"아.... 네. 다시 통화해 보겠습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만약 불합격 되었다면, 옹상무와 그에게 사주한 위정자들의 행태가 정당화될 뻔했다. 내 거취에 대한 또 하나의 옵션이 생기긴 했으나, 선택을 할 것인가 고민이 남았다. 오롯이 내가 선택을 해야 했다.
회사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시장점유율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품전략이나 손익 추이에서도 그랬다. 특히, 위정자들의 의사결정 과정이나 조직책임자들의 선정이 바른말을 하는 사람들을 쳐내고 있었다. 인사부서의 입김이 거세졌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서서히 침몰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죽는지도 모르고 삶아진다는 말이 딱 이경우란 생각이 들었다.
회사야 워낙 덩치가 크니 넘어지는데 10년이 걸린다 쳐도, 중요한 것은 회사 내 나의 입지였다. 이미 면팀장이 되었고, 나중에 다시 기회를 잡아 재기를 노리기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고 봐야 했다. 다시 기회를 잡은 옹상무와 같은 무리들이 최소 2~3년은 갈 것이고, 후에 세대교체가 일어나면 나의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기회가 가지 않을까? 그렇다면, 최근 며칠 저녁을 함께 보냈던 선배들처럼 나 역시 그 무리에 섞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했다.
현직장의 정황만 보면, 이직을 포기할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웠다. P사로의 전배는 계열사 전배라 소득면에서 나빠질 것이 없었다. 회사 내 처우도 실장급이라 여기보다는 좋을 것이었다. 유일하나 심각한 Risk는 나름 유능하다는 전임자가 위정자들의 등쌀에 한 순간에 팽을 당할 만큼 정치적 바람이 거센 상황임은 감안해야 했다. 그 역시 나처럼, 새로 부임한 A사업부장이 밀어냈다면, 그와 나는 유사한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는 회사에 잔류를 택해 좌천되었고, 나는 이직을 선택해 낙하산이 되어 부임하게 되는 모습이었다. 물론, 영문도 모른 채 지원한 나는 전임자를 밀어낸 놈으로 함께 일할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고, 몇 달 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지금과 똑같은 신세가 될 수 있었다. 이직 후, 다시 이런 꼴을 당한다면 퇴로가 없었다. 잘못해서 외부 시장으로 나왔을 때, 기존회사에서의 경력을 부정당할 수도 있었다. 생각이 많아 결정이 어려웠다.
다시 전화가 왔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P사 인사팀에 전화를 해서, 말씀하신 내용 전달 했습니다. 일주일 뒤에 월요일 출근 가능하시냐고 묻네요."
인사팀도 나에게는 안심하고 상의할 대상이 아니었다. 아직 결정도 못했는데, 어쩐다...
가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결정을 번복하게 되면, 인사팀에도 척을 지게 될 것은 뻔했다. 고민이 길어졌다.
"여보세요? 팀장님?"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마음의 결정을 못했지만, 시간을 더 달란다고 했을 때, 기회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을 막고자 했다. 이 순간부턴 P사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이나마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이 선택은 옳을까?
금요일 오후, 모처럼 잉여로운 오전을 보냈는데, 느닷없는 통보를 받은 탓에 머릿속이 온통 전쟁이었다. 잔류는 미래가 뻔하고, 계열사 전배는 불확실했다. 뻔한 미래를 선택할지?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해 갈지? 결정을 해야 했다. 아내는 옮기는 게 맞다고 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에 한 명인 데다 나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기에 합리적인 조언일 터었다. 골머리를 앓고 있다가 옆에 않은 최팀장과 눈의 마주쳤다.
"뭐라노? 연락 온 거 아이가?"
한 층 아래 휴게 공간으로 장소를 옮겨 P사와 또 인사팀과 나눈 이야기를 털어놨다.
"뭔 걱정이가?, 당연히 가야지... 여 남아 뭐 좋을 게 있는데?"
"전임자가 버림받는 것 같던데? 나도 가자 마자 그리 될까 고민돼서요"
"다 이팀장 하기 나름 아이가? 여 뭐 볼 게 있노? 미련이 있나?"
"그렇긴 한데, 물류는 아는 게 없어서.... 사람도 모르고..."
"직접 사업하는 게 아니라, 전략이라메? 여나 거나 뭐가 다르겠노?.... 아니, 여서도 어차피 혼자 고민한 거 아이가? 아들(팀원들)이 뭐 시키는 데로만 했지.... 괜찮다..."
"그럴까요?"
어차피 이직은 Risk가 많다. 친구 녀석에게 이력서를 보냈을 때, 사실상 마음은 떠났다. 잔류하면 오늘을 생각하며,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이미 두어 차례 지주회사 전배를 두고 잔류한 것에 대해 후회를 했었다. 선택을 하지 않아 생기는 후회는 더 이상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난, 다 풀어 논 수학 시험지에 미련을 두고 시험이 종료되길 기다리면서 답안지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