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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 이부장 Aug 26. 2024

13... 선택을 선택하다

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 이야기... Part13

혹자는 이직을 몸값 높이는 수단이라 한다. 기존의 환경을 버리고 가는 Risk에 대한 보상이란다. 바뀐 근무 환경(시스템, 인적 네트워크)에서도 성과를 내달라는 기대이자, 적응기간 동안 받을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이지 싶다.


내 경우는, 직접 나서서 조건을 네고(Nego)하는 프로세스가 아니었다. 나의 이직은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비자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경험과 역량을 살려 몸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자리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야밤에 당한 퍽치기처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길바닥에 나뒹구는 처지였다. 옵션(Option)이 생긴 것이 다행이고 행운이었다. 그나마 능동적이었던 또 다른 이직 자리는 실패했고, 이제 선택은 잔류와 자매사 전배만 남았다.


황당한 상황에 매몰되어 질식하지 않고, 다음 행보를 찾는 과정도 힘들었지만, 정해진 답을 들고도 망설이는 나를 달래는 것도 필요했다. 이제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회사에서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자. 물류는 이제라도 공부해서 따라가 보자. 실장이라는 자리가 주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버텨보자 세뇌했다. 포기옵션은 버리고, 자매사 전배라는 옵션을 선택하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인사담당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상의드릴 게 있어 왔습니다."

"어서 와요. 그렇지 않아도 좋은 소식 왔다고 들었는데. 1주일 시간을 달라고 했다면서?"

"네, 인사도 드리고, 마음정리도 필요해서요"


"아, 그런데... 제가 고민되는 부문이 있습니다."

"......"


"들어보니, 전임자가 팽을 당하고 지방발령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저보다 나을 텐데, 제가 더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태도가 문제였다고 들었어요. 그건 확실히 이팀장이 장점을 갖고 있어요. 업무야 가서 익히고, 극복해 내야 하고..."


정해 놓은 답변을 들은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맘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확신에 찬 격려를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답답했다. 대화를 더 끌고 나가지 못하는 상황인데, 차마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주저하는 나를 보고 그가 한마디 보탰다.


"CEO께도 이미 말씀드렸어요. 혹시 마음의 변화가 있다면, 빨리 알려 줘야 합니다."

"...... 네, 그럴게요."


CEO! 뭘 말했다는 거지? 이게 보고드릴 일인가? 그리 챙길 것 같으면, 면팀장을 시킨다 했을 때, 누군가 막았겠지. 예상치 못한 발언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CEO께서 과거 COO시절 수년을 보좌했었지만, 그 후 다른 계열사에서 상당기간 있으셨고, CEO승진과 더불어 다시 복귀하셔서 정신도 없으실 텐데. 나를 기억하셨을까? 행여 기억한다한들 그리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나의 이직을 특별히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란 게 뭘까? 뭔지 모를 찜찜함을 두고 그의 방을 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거대한 기만에 빠진 듯한 불편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냉정해 지자. 우선, 맘을 먼저 정하자. 떠밀리듯 가선 안된다. 오롯이 나를 위한 결정에 집중하자.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이 선택은 옳은가?'


대학을 막 졸업한 새내기가 야근을 일삼으며, 청춘을 쏟아부었던 노력과 회사 기여도를 고려하면,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인맥 또한 여기에 두고 가니 남는 장사는 아니었다. 혹자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경험이 체화되었고, 그로 인해 쌓인 내공이 보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험 중 많은 것이 여기서 더 유효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들이라 이 또한 셈을 하기엔 부족했다.


그렇다면, 더 나은 처우를 받을 수 있었나? 여기서 승진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으나, 이미 없어진 옵션이었다. 타(他)직장으로 이동은 회사가 보상해 줄 일이 아니었고, 우연하게 기회가 주어진 승진을 전제로 한 자매사 전배가 어쩌면 차선책으로서 선택 가능한 수였다.


비자발적 선택이나, 더 나은 선택지가 없다. 소중한 기회이다. 지쳐 있는 몸과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던 한 단계 승진은 한다. 맞다. 곱씹어 생각해 봐도 선택함이 맞다. 가자. 도전해 보자.

  

어렵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이제 여기를 어떻게 마무리할지 생각 정리가 필요했다. 우선, 나의 선태을 기다려준 전략 팀장님께 먼저 상황공유를 하고, 양해를 구했다. 마지막까지 그는 따뜻했다. 나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잔류보다는 이직이 바른 선택이라는 조언도 해 주었다.


다음은 자리에 앉아 퇴직함에 있어 인사드릴 분들의 List를 만들었다. 근무지역별로 구분을 했다. 본사와 공장을 나누고 임원분들은 비서를 통해 인사 가능한 시간을 잡았다. 해외 근무 중이신 주재원 분들과 출장자는 이메일로 갈음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아, 팀장님, 인사팀인데요. 퇴직 관련 프로세스 안내차 전화 드렸습니다."

"네,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프로세스 안내 메일을 드렸습니다. 읽어 보시고, 진행 주시면 됩니다."

"네, 그럴게요."


인사팀 전화였다. 퇴직 및 이직을 위한 프로세스를 밟아야 한다고 했다.


"팀장님, 우선, 퇴직금 어찌하실지 정해주세요."

"어떤 선택지가 있나요?"

"계열사 간 전배여서, 퇴직금 승계가 가능합니다. 아니면, 이번에 정산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희망퇴직이 아니라서 추가지급을 받을 대상에서는 제외됩니다."


퇴직금이 직전 3개월 통상임금에 근무년수를 곱해서 산정되는 로직을 이미 알고 있는 터라, 굳이 이번에 정산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다닐지는 모르겠지만, 자매사간 이동이면서 팀장에서 실장으로 승진하는 조건이다. 임금이 오를 예정이므로 퇴직금은 승계해서 추후에 더 많은 금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잔여휴가 역시 자매사 전배로 근무가 지속되므로 정산 대상에서 제외되고, 승계된다고 했다. 그 외에 잔여 복지포인트 소진, ID카드에 남아 있는 식사비 정산 등 자질구레한 것까지 결정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퇴직사유 및 인터뷰였다.


퇴직 사유는 '자매사 요청으로 인한 이직'으로 적었다. 분명했다. 다만, 형식적으로 치러질 인터뷰에 옹상무의 관행적 불합리함과 회사가 벌이고 있는 부조리한 정황에 대해 소신껏 이야기할 것인가? 무탈하게 마무리할 것인가? 에 대한 선택도 남아 있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판에 소신을 담아 본 들, 그것이 제대로 전달될 리 없다고 판단했다. 해서 회사가 어려울 때 떠나게 되어 아쉽고, 하루빨리 정상화되어 과거의 위상을 되찾기를 바란다는 입에 발린 말로 마무리했다. 멀리 서라도 응원할 것이고, 혹시나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연락 바란다는 간교함도 넣었다. 회사에 대한 나만의 복수였다.


대비하지 못한 힘든 과정이었지만, 나의 위기에 대해 동료라 착각했던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친구는 가까이에,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영화 대부(代父)의 대사가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있는 경험이었다. 나는 내가 먼저 챙겨야 한다는 진리를 회사생활 20년을 겪고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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