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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 이부장 Sep 02. 2024

14... 이별에도 정성이 필요하다.

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 이야기... Part14

퇴사를 잘하는 방법은 아마도 관계를 잘 매듭짓는 것이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는 조언 중 하나였다. “끝인상”이 첫인상만큼이나 강하게 남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안 볼 사람인 양 업무를 방치하거나, 떠 넘기는 것은 무례하다. 책임감이 없어 보이고, 동료를 기만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디에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나는? 

이미 용팀장에게 수행 중인 업무에 대한 인계는 했다. 다만, 서로 어색한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은 어쩔 수 없었다. 용팀장은 배려차원에서 추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나도 팀의 에이스(Ace)인 태과장을 따로 불러 실무자들은 알 수 없는 정치적 구도나 위정자들의 속내 등을 귀띔해 주었다. 기존 업무 중 진행 중인 업무는 출근일까지 이슈여부를 확인했고, 새로 시작되는 일은 인계할 사람이 첨부터 시작할 수 있게 배려했다. 옹상무 산하 공통업무 중 우리 팀이 해왔던 업무는 옆에 있는 최팀장 주관으로 재분배하는 과정을 거쳤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인연 재정립이었다. 비록, 조직 내 역할로 인해 시작한 인연이겠지만, 존경해서 만남을 지속하고 싶은 분도 있고, 공동의 적(주로 상사)을 두고 의기투합했던 관계, 업무상 도움을 많이 받았던 관계 그리고 내가 성장하는데 많은 지원과 도움을 받았던 분들께는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마무리 과정이 필요했다.


관계를 정리하며 작성한 명단을 보니, 20여 년을 일한 것 치고 명단에 적힌 분들이 많지 않았다. 관계가 깊었던 선배 중 이미 퇴사를 하신 분들도 있고, 일련의 소동을 겪으면서 민낯을 본 덕에 가짜 친분들이 필터링된 결과였다. 


우선, 나의 거취에 무관심해서 일부러 찾아가서 너스레를 떨고 싶지 않은 분들을 배제했다. 추가로 과거에 형, 동생 했던 분 중에 임원이 되어 직간접적으로 내상황을 들을 수 있었고, 그럼에도 동의하거나 침묵했다고 생각되는 분들도 제외했다. (용감하게도 이직 후, 갑이 될 고객사의 고위직을 배제해 버렸다. 곁에 있음에도 외면한 분이라면, 이직해서 을(乙)로 찾아뵈었을 때는 안 봐도 뻔한 결과라 판단했다.) 후회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나의 선택이었다.


또한, 찾아 뵐 마음이 가지 않는 분들도 제외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되돌아보면 열심히만 일했던 나를 소모품처럼 이용했던 상사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었다. 나를 매일같이 괴롭혔어도 내성장에 도움을 주신 분들과 구분이 모호해서 경계에 있는 분들은 명단에 포함했다.


우선, 사내면접을 통해 팀장의 기회를 주시고자 했던, A사업부장을 가장 먼저 찾아뵈었다. 퇴사란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셨다.


"팀장 못하게 되어서 나가는 거니?"

"더 이상 회사에서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 결정했습니다."

"그래도 퇴사는 아니지,  아직 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성급한 거 아니냐?"


내 답변을 듣기도 전에 그는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하셨다.

"어, 박담당. 나야. 이팀장 퇴사 한다고 인사 왔는데,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건가? 아무리 회사가 어렵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


"뭐라고? 아...."
"......"
"이걸? 참 나....... 알았어. 일단 끊어봐..."


인사담당과 통화를 하셨고,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 회사에 잔류하라는 말씀은 더 이상 하지 않으셨다.


"그래, P사로 간다고?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건가?"

"사업부 기획실장이라 들었습니다. 산하에 기획팀과 전략팀이 있고요."


"아, 먼저 하던 일이랑 비슷한 거네, 다행이야.... 어떻게 가게 된 건가?"

"저번에 사업부장님 면접 직후에, P사에서 우리 인사팀을 통해, 인원요청이 들어왔고, 그들이 원하는 스펙(Specification)에 부합해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나오나?"

"이번주까지이고, 차주부터는 P사로 출근합니다."


"이런, 밥도 한 끼 못하고 가겠네, 내가 오늘은 선약이 있고, 내일 아침 비행기로 미국 출장이라... 어쩌지?"

"괜찮습니다. 출장 다녀오셔서 불러 주시면, 찾아뵙겠습니다. 30분 거린데요..."

"그러자고. 가서 꼭 승진하고. 건강도 챙기게나..."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 제가 대리 3년 차였습니다. 팀에 쟁쟁한 선배들도 많았는데 제 의견을 끝까지 들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주회사에 추천까지 해 주셨는데, 제가 M&A 업무 배우겠다고 못 간다고 했던 것도 죄송하고요. 또 제가 전사 경영기획팀장 하다가 사업부로 온다 했을 때, 너라면 이견 없다 받아 주신 것도 감사했습니다."


"그게... 이팀장이 열심히 하고, 잘하니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거지... 지나간 일이지만, 지주회사에 추천했다가 거절당했을 때, 내가 많이 곤란했었다고.... 허허허...."


"송구스럽습니다. P사 가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생각나실 때 불러 주시면, 달려오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A사업부장님께 퇴직인사를 빌어 평소 드리고 싶었던 말씀까지 드리고 나니, 비로소 내가 퇴직한다는 것이 실감 났다. 본사와 공장을 오가며, 감사드릴 분들 한분 한분 찾아뵙고, 인사드렸다.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리스트(List)에 있는 분들 중 두 분을 제외하곤 목요일 오전까지 인사를 마칠 수 있었다. 공통적으로 퇴사에 의아해하셨고, 왜, 이런 상황이 되셨는지 궁금해하셨다. 일부는 모른 척 소스라치게 놀라시는 명연기자도 있었다. 과거 코흘리개 시절 챙겨주시고, 성장시켜 주신 고마움에 대한 인사라 생각하고 나도 모른 척 설명드렸다.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조직에 대한 팁(Tip)을 주시는 분, 미리 사놓은 책을 건네주시며 격려하시는 분, 두 손을 움켜쥐고 눈물을 보이시는 분 등 다양한 분들께 청춘을 담았던 직장생활에 대한 인사를 마무리했다. 시원함 보다는 섭섭함이 컸고, 인사 후에도 여운이 계속 남았다. 힘들었다.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한 두 분 중 한 분은 CFO 셨다. 미리 잡아 놓은 약속 시간이 계속 바뀌었다. 며칠째 미뤄지던 약속은 회의로 바빠 도저히 시간이 안 난다는 말로 돌아왔다. 예상대로였다. 이 사태의 시작점이라 추측되었던 분은 끝내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아마 대면으로 인사드리는 것은 원치 않으신 것 같았다. 불편했겠지. 화가 났지만, 마지막까지 일관성을 유지해 주신 덕분에 마음정리는 오히려 쉬웠다. 


그래도 아랫사람으로서의 도리는 다 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잘 매듭짓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생채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나를 위한 배려였다. 이메일을 열고, 공손하게 감사의 메일을 드렸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서 담백하게, 너무 짧지 않게 썼다. 


마지막은 CEO 인사였다. 비서를 통해 받은 일정표에는 전혀 빈틈이 없어 보였다. CFO께 먼저 인사를 드리려다 일정이 밀린 탓에 벌써 목요일 오후. 급하게 밀어 넣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인사담당께서 직접 말씀을 드렸다 하니, 굳이 찾아뵙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최근 품질 이슈로 골머리를 앓고 계신데, 뭐 좋은 일이라고 시간을 뺏어서 되겠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행비서께 일정 문의를 드렸다. 역시나 급작스런 일정추가는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CFO와 마찬가지로 이메일을 통해 먼저 인사를 드리고, 혹시 찾으시면 뵙기로 마음먹었다. CFO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정말 감사하는 마음에서 인사를 고했다. 모실 때 정말 힘들었지만, 돌아보니 덕분에 많이 배웠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어려운 상황에 다시 모시게 되어 송구했던 마음과 시간을 걸리겠지만 꼭 이번 위기에서 잘 이끌어 주실 거라는 믿음을 담아 정성껏 메일을 썼다. 이번엔 너무 길지 않게 썼다. 정제해서.


옹상무 산하에서 같이 일했던 팀장들은 후배의 이직을 부러워했다. 같은 팀장에서 이제 혼자만 실장님이 되었다고, 돈 잘 버는 회사로 가게 된 것이 가장 부럽다고 했다. 새직장에 출근했을 때, 차가운 도시 남자처럼 보이라는 뜻으로 트렌치코트(Trench Coat)를 선물해 주었다. 여러 명이 각출했다며, 이 멤버 중 다른 사람이 퇴사하게 되면, 너도 꼭 보태라는 농도 빼먹지 않았다. 옹상무는 마지막으로 단체 회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내 송별식이라 칭했지만, 사실은 희망퇴직을 하는 인원들과 섞인 합동 송별이었다. 오히려 좋았다. 이제 과거가 된 팀원들은 롤링페이퍼(Rolling Paper)와 준비된 선물을 주면서 아쉬운 마음을 표현했다. 요 며칠새 보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몇이나 진심일까 싶긴 했으나, 감사하게 받아 드렸고, 떠나는 사람으로서 아쉬운 마음과 평소 코칭해 주고 싶었던 몇 마디 덕담을 건넸다. 단체 회식 후, 용팀장의 배려로 과거 팀원들과의 2차 자리를 만들었으나, 녀석들의 어색해하는 표정을 보고, 며칠간의 과음을 핑계 대며, 정중히 거절했다.


서둘러 회식자리를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한적한 곳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들이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한다는 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셨다. 행여나 잘못한 일은 없었는지 걱정도 하셨다. 자매사 전배이고, 승진해서 간다는 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셨는지 조금은 누그러 지신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마쳤다. 


다시 지하철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양손에 선물보따리도 있고, 가방엔 미쳐 버리지 못했던 나의 애장품(필기구)들이 제법 무거웠다. 마음을 바꾸고 택시를 불러 탔다. 한경변의 야경이 유독 멋져 보였다. 다시 보기 어렵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까? 벌써 아련했다. 


퇴사를 하루 앞둔 저녁은 이렇게 번잡하고, 길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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