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원주였다.
추석 연휴가 길어 애인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원래는 금요일에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차표가 없어, 목요일 퇴근 후 밤기차를 타기로 했다. 명절 귀성표를 예매했다고 하니 회사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 어려운 걸 어떻게 했냐며 신기해했지만, 사실은 애인이 대신 예매해준 덕분이었다. 다들 “대단하다, 능력 있다” 했지만 정작 나는 그 말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새로고침을 누르며 표를 잡은 그 마음이 능력이라면, 세상엔 그런 능력자가 꽤 많을 테니까.
다음날 아침엔 애인과 함께 런데이를 켜고 원주천을 따라 달렸다. 흐린 날이었지만 낮이라 그런지 물빛이 반짝였고, 시원한 공기가 달릴 만한 이유가 되었다. 늘 각자 사는 곳에서 런데이를 하다가 처음으로 애인의 동네에서 함께 뛰니, 괜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점심은 새로 생긴 밥집에서 먹었다. 지갑을 두고 와 신한은행 앱으로 결제했는데, 막 오픈한 가게라 그런지 직원이 조금 서툴렀다. 잠깐의 버벅임조차 연휴의 여유 속에서는 그저 웃음이 났다.
오후엔 넷플릭스로 <은중과 상연>을 봤다. 90년대 초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두 친구의 성장과 갈등을 다룬 드라마였다. 당시 신도시의 풍경이 잘 재현되어 있었고, 여자아이들 사이의 질투와 우정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애인은 흥미가 없었는지 중간쯤에서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이 왠지 평화로워서 나도 더 이상 화면에 집중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추석엔 역시 영화 한 편쯤은 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였다. 처음엔 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를 볼까 했지만 평이 좋지 않아, 대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골랐다. 제목도 시놉시스도 특별할 건 없었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온다는 말에 왠지 끌렸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완벽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강렬했다. 사회 풍자와 전개, 그리고 후반부 추격 장면의 긴장감이 대단했다. 엔딩 크레딧에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름이 뜨는 순간, 놀라움과 함께 웃음이 났다. 몰라봤기에 오히려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올해 본 영화 중 단연 최고였다.
다음날 점심엔 리을리을 커피로스터스에 갔다. 처음 갔을 때도 인기 많은 곳이었는데,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자리를 간신히 잡고 마신 커피는 여전했다.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에스프레소 바라서, 보는 즐거움과 마시는 즐거움이 함께 있었다. 애인이 친구 생일 선물을 고민하길래 이곳 선불권을 추천했다. 그 친구가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안 그런 척했지만 혼자 뿌듯했다. 오후에는 애인이 회사 일을 하러 나가 혼자 스팀덱으로 <슈로대Y>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애인 집에서 게임을 하다 보니 어색한 기분이 들어 조금 하다가 일찍 잠을 청했다.
원주에 있기로 한 마지막 날엔 조조로 <어쩔 수가 없다>를 봤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갔지만, 평이 왜 갈렸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미장센과 음악은 훌륭했지만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각자의 서사를 모두 담으려다 중심을 잃은 영화였다. 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두 번 볼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추석에 뭐 했냐’는 질문엔 대답할 수 있는 이야기 하나를 챙겼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집에 돌아와 넷플릭스로 <유리심장>을 봤다. 유튜브에서 오프닝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던 드라마였다. 음악과 영상이 모두 좋았고, 배우들이 실제로 연주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곡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째로 보여주는 연출이 멋졌고, 보는 내내 마음이 벅찼다.
그렇게 원주에서의 며칠이 흘러갔다.
느긋했고, 조용했고, 평범한 시간이었다. 짧았지만 그 평범함이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