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적인 사람이 되지 마라

Never be a cynic, even a gentle one.

by joni

냉소적인 사람이 되지 마라. 온화한 것이어도. 악마를 조롱하는 것에도 일조해선 안 된다.

Never be a cynic, even a gentle one. Never help out a sneer, even at the devil.

-바첼 린지(Vachel Lindsay, 1879~1931)




힘들다, 살기 싫다, 요즘 자꾸만 드는 생각이다.

살기 싫다니, 너무 끔찍한 말인데 세상 사람들 모두 한 번쯤은 머릿속에 떠올려 본 적 있는 말이다. 살기 싫다니, 생물학적 유기체로서 너무나 부조리한 말이다. 과연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도 어느 날 갑자기 '살기'를 싫어하는가? 어쨌든 이런 막돼먹은 생각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내 놓는 종족은 지구상에는 우리 인간뿐이다.


지구상 모든 생물의 제1원칙은 ‘생존’이라고, 나는 그렇게 배웠던 게 기억난다. ‘생존 본능’, ‘생존법’, ‘생존 기술’ 하여간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수많은 지식과 아이디어가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이 모든 지식을 갑자기 배반하고 싶어 한다. 왜? 왜 그러는데? 사는 게 팍팍해서? 사는 게 지쳐서? 그런 단순한 이유를 천 가지 만 가지 대봤자 어느 것 하나 설득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왜냐, 우리는 생존을 제1원칙으로 하는 생물이며, 고로 살기 싫다는 말은 결국 거짓말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결국 스스로를 영원히 고통에 빠뜨릴 바로 그 질문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이 질문의 앞머리에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붙어야 할 것 같다. 엉망진창이고, 힘들고, 괴롭고, 따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여, 냉소를 배우지 말라!’ 나는 이게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 적지 않은 나이,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나이, 그럼에도 '젊은이들이여, 냉소를 배우지 말라!'라는 이 말은 썩 멋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데?'라는 질문에 냉소가 빠질 수가 없다. 살아서 뭐 해. 어차피 죽을 건데.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 돈, 명예, 행복, 사랑, 죽으면 다 없어지는데. 죽으면 끝이야. 냉소는 너무 쉽다. 쉽고 빠른 것이 미덕인 현대에, 냉소는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시대정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빨리 배우고, 더 쉽게 성장하고, 더 많이 얻는 것이 생존을 유리하게 한다고 배우고 있다. 노력은, 이제 가치가 땅에 떨어져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노력으로 일궈낸 성과를 논하는 사람은 이제, ‘노력만 하면 다 되는 쉬운 시대’를 살았던 혜택 받은 심플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다.


쉬운 것이 곧 돈이 되는 시대가 왔다. 1.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번다. 2. 어려운 일을 쉽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있다면 잘 팔린다. 3. 어려운 시도를 쉽게 해낸 사람이 위대한 사람으로 추앙받을 수 있다. 일의 과정을 쉽고 단순하게 만들 줄 알아야 쓸모가 생긴다. 사람들이 더 이상 노력의 가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고 빠르게 해내기를 원하고, 할 일을 뚝딱 끝마친 다음에 편안하게 자유를 누리는,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법이다. 사람들에게 '뭐 하는 게 제일 좋으세요?'라고 물어보면 '가만히 누워있는 게 제일 좋아요'라고 답하기도 한다. 당연하지. 편하고 안락한 침대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니즈와 욕구를 빠르고 정확하게 간파하게 해주는, 기가 막히는 도구로도 쓸 수 있다. 모두가 쉽고 편한 것을 원하므로, 회사는, 서비스는, 사회는 그쪽으로 돈이 몰릴 거라는 걸 똑똑히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렇게, 세상은 계속 쉽고 단순하고 편안해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런가? 세상이 쉽고 단순하고 편안해졌는가? 아니, 사실은 쉽고 단순하고 편안해 보이는 모달 이불로 복잡함과 어려움, 고통과 노력을 싸악 덮어 가려둔 것일 뿐이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이불 위에서 소비를 반복해 온 우리는 더 이상 노력과 애씀의 효용을 믿지 않게 되었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과제, 보고서, 문서를 꾸며야 한다면 ChatGPT한테 해달라고 하면 될 일이다. 내가 해야 할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지,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지, 아니, 때로는 그냥 알아서 해달라고만 해도 충분하다.

잠깐, 말이 너무 장황해진 것 같다. 나는 세상을, 사회를, 자본주의를 비판하려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본능에 따라, 본능을 좇아 지금 여기, ‘쉽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 배부른 인간의 위치에 와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탐구하는 소크라테스적 인간이란 이제 과거의 혜택 받은 심플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냉소를 배우는 것이 당연하다. 냉소를 통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쉬운 한마디를 뽑아낼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냉소를 체화했기 때문에 삶을 포기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오히려 이런 냉소를 품은 채로도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하루하루를 넘겨 보낼 수 있는 우리, 우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하기가 어렵다. 평생에 걸쳐 골똘히 생각해도 답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하루 일과를 견뎌내는 와중에도 틈틈이 자꾸만 이 어려운 질문을 떠올리면서, 손쉬운 대응법인 냉소를 애써 모른척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하기 싫은 일들과 고통스러운 의무의 자리를 견디면서도 계속해서 질문해야 한다. 너무 어렵고, 복잡하고, 오래 걸리고,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그런 생각 안 하고 살면 편해’라고 말한다. ‘그런 생각 자꾸 하면 우울해져’, ‘왜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라고도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반대한다. 이 질문을 멈추면 안 된다고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해본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살아있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피가 흘러서 살아있다.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죽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이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자꾸만 허무해지고 울적해진다. 허망한 마음과 울적한 마음으로 삶을 지속한다는 건 꽤나 비극적인 일이다. 친구들을 만나서 즐겁게 저녁 식사를 하고서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아주 아주 흥미로운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를 통째로 끝내고 리모컨을 집어들 때 ‘왜 아직도 허전하지? 다른 거 볼 거 없나?’하고 의문을 품는 나를 마주한다면, 이 모든 뜻 모를 공허함에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면 그때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것처럼 하루하루를 빈 페이지로 넘기고 있는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살아는 있는데, 왜 살아있는 거야?


그런 질문을 하지 말자고 말할 때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이 없었다면 자우림의 김윤아는 <샤이닝>이라는 희대의 명곡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 대신 고민해 주었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아니, 다른 사람이 찾아놓은 답은 나한테 꼭 들어맞지가 않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공장에서 찍어낸 자동차처럼 생물학적 종이 같다고 해서 부품이 호환되지도, 형태가 꼭 들어맞지도 않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특별하기에, 각자 자기 자신만을 위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감히 적어버리긴 했지만 사실 죽을 때까지도 답할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 순간순간, 찰나마다 계속 달라지는 답이라고 하더라도 자꾸 고민하고 노력하고 애쓰고 공을 들여서 뭐라도 뱉어봐야 한다. 어제까지는 이래서 내가 살아있는 거라고 하고, 내일은 또 어제의 내가 영 멍청했던 것 같다고 말하고 다시 적어보면서, 그렇게 우리는 계속 노력하고 애쓰며 살아야 한다. 사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루아침에 ChatGPT가 장문의 리포트를 뚝딱 완성하듯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차 문짝에 들어가는 나사 하나부터 ChatGPT와 거대한 완성체 우주선까지, 그 과정의 어려움을 차근차근 견뎌내지 않은 채로 만들어진 것이 없다. 편안하고 푹신한 모달 이불이, 우리 집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긴 여정을 해왔을지 상상해 본다. 시커먼 먹구름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빗물이, 어떻게 씨앗에 생명을 부여하고 작물을 길러내어 내 식탁에까지 올랐을지를 상상해 보면 알 수 있다. 세상 그 어느 것도, 냉소를 거쳐 태어나지 않았음을. 누군가는 가능하다고 믿었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기에, 지금 이 전기장판이 내 침대를 따끈하게 데워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젊은이여, 냉소를 배우지 말자!




냉소적인 사람이 되지 마라. 온화한 것이어도. 악마를 조롱하는 것에도 일조해선 안 된다.

Never be a cynic, even a gentle one. Never help out a sneer, even at the devil.

-바첼 린지(Vachel Lindsay, 1879~1931)


말 그대로 냉소를 가지지 말라는 의미이며, 세상을 좀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바라보라는 조언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면서 타인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해 이를 실천하기를 바라는 바첼 린지의 철학을 반영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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