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지옥이다

Hell is other people.

by joni

01. 타인은 지옥이다

Hell is other people.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우리는 이 문장을 너무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제목으로 된 여러 가지 미디어들이 많았기 때문도 있겠고, 문장 자체에 담긴 단어와 표현이 다른 의미로 와닿는 면이 있어서도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이 싫다’,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는 식으로 알고 사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다들 이런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험에 빗대어 두서없이 한번 설명해 보겠다.


그러니까… 대충 이런 식이다. 나는 혼자 있을 때 그럭저럭 밥도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자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나는 어쩐지 맨날 굶고 밤새 잠도 안 자는 막장 인간으로 취급당하는 경우가 생긴다. 혼자일 때의 나는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자고 싶은 만큼 잤으니 스스로를 자유롭고 편안하다고 인식했는데, 내 친구들은 나를 전혀 그렇게 바라보고 있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건 좀 아이러니한 이야기이지만 타인과의 비교,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나’가 객체가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내가 나 자신을 ‘잘 안 먹고 잘 안 자는’ 인간으로 인식할 방법이 없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존재가 곧 자유라고 말했는데, 결국 그는 존재를 인식하려면 타인으로부터 관찰을 당해야 하고, 관찰을 당하는 순간부터는 이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는, 뭔가 아주 기분 나쁜 관찰기를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내놓은 셈이다. 참 절망적인 통찰이다.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면, 나는 나 스스로를 유연하고 호기심 넘치며 임기응변에 능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주변의 누군가는 나를 두고 고집불통에 냉소적이고, 말 안 통하는 뻣뻣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생각해 보게 된다. ‘나 정도면 고집불통인 건가?’, ‘나는 호기심 넘치고 자유분방한 게 아니라 냉소적이고 뻣뻣한 편에 속하는가?’ 왜냐하면 어찌 됐든,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고집불통인 것과 자유분방함을 수치화할 수 있는 양 극단의 척도라고 가정하고, 0에 가까울수록 고집불통이고 10에 가까울수록 자유분방한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한 3~4 정도 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어디쯤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아무에게도 ‘관찰당하지 않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런 질문에는 아무래도 대답하기가 어렵다. ‘음… 저는 좀 제멋대로인 것 같아요.’ 무슨 기준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집에서는 파자마 상의를 안 입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아무도 안 볼 때에는 몰래 횡단보도 신호를 위반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타인의 관찰 속에서 판단되고 인식된다는 것이 사르트르가 말한 최초의 의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니까 타인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넌 너무 고집불통이야.’라고 말하면 그간 ‘유연하게’ 떠들어 온 내 주둥이는 머쓱해지는 수밖에 없다. ‘아니야 난 유연해. 네가 오해하는 거야.’라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나보고 유연하다고 해. 너만 나한테 고집불통이라고 하는데?’라는 식으로 또 다른 타인의 관찰기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도 일어난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귀엽다’고 하고, 누군가는 나를 보고 ‘무섭다’고 한다. 물론 내가 어떨 때는 귀엽고, 어떨 때는 무서운 사람이라서 그런 걸 테지만, 또 내가 누군가에게는 귀엽게 굴고 누군가에게는 무섭게 구는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나’라는 하나의 인간을 두고 각기 다른 감상을 내놓는다는 것은 신기하고도 혼란스러운 일이다. 타인의 관찰과 객체화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이 저주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냥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하고 이 모든 혼란을 끝내버릴 순 없다. 그러니, 나를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기로 선택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라면(ex. 우리 엄마) 내가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결국에는 나를 예뻐하고 귀여워할 테고, 기왕 타인에게 관찰당하는 지옥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거라면 이렇게 예쁘고 귀엽게 관찰당하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좋게만 봐줄 수는 없겠지만 나를 좋게 봐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옥은 꽤 견딜만해질 것이다.

이걸 다시 내 이야기로 설명해 보자면 내가 하는 행동들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럭저럭 참아줄 만한 정도이기도 하고, 또 참을 수 없을 만큼 짜증 나고 성가신 정도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카펫이 깔린 바닥에다 음료수를 쏟고서 머리를 쥐어뜯고 절망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바보!’라고 외치는데, 이건 후자에 속하는 타인의 관찰기로부터 얻은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결과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때 실제로 곁에 있었던 누군가는 그저 타월을 가져다주면서 ‘닦고 말리면 되지 뭐’라고 말해주었으며, 추측컨대 그 사람이 관찰한 나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그냥 ‘그럴 수도 있지 뭐.’에서 그쳤던 것 같다. 만약 그때 내 옆에 있었던 누군가가 ‘야이 멍청아!’라고 했으면 아마 나는 ‘바보!’ 다음에 ‘멍청이!’까지도 외쳐야 했을 거고, 이는 결국 나 스스로를 '바보+멍청이'로 인식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좀 비약인가?


어쨌든 이런 식으로 쌓아 올려지는 자기혐오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내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타인은 지옥이다. 나도 남을 관찰하면서 툭 내뱉는 나만의 관찰기들이 있을 것이다. ‘넌 진짜 웃겨’, ‘넌 진짜 착해’, ‘넌 진짜 미쳤어’와 같은 뭐 이런 별 것 아닌 것 같은 말들도 모두 당사자에게는 자기 인식의 형태로 가닿았을 것이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내가 웃기다고? 그런가? 나 개그 유튜버 해볼까?’까지 나아가게 된다면 분명 이 사람이 개설한 개그 유튜브 채널에는 나의 이 별것 아닌 한마디에 대한 지분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명언은 ‘말조심하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게 되겠지만, 내게 자신의 관찰기를 공유해 주는 타인이란 전부 다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제각각의 존재들이다. 언제나 누군가는 내게 멋지다고 할 테고, 누군가는 내게 못났다고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관찰당하는 지옥에 살긴 하지만, 내가 멋진지 못났는지를 나 스스로 결론지을 힘 정도는 이미 가지고 있다. 앞으로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발견해 낼 것이고 비록 그것이 무지막지하게 고통스러운 시간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니체의 정신을 받들어 나 스스로의 이미지를(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나를 견딜 만한 인간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살아가자. 그 외의 타인은 지옥이다. 지옥이다! 그리고 나를 견딜 만한 인간이라고 여겨주는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지금보다 더 견딜만한 사람, 더 더 견딜만한 사람이 되고 나중에는 아예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 주변 사람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조차 끊임없이 성장하는 나에 대한 관찰기를 내놓을 것이며, 나 또한 이들에게 멋진 관찰기를 되돌려 줄 의무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관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고통도 물론 수반된다).



타인은 지옥이다

Hell is other people.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 등장하는 대사로, 죽어서 지옥에 갇힌 세 사람이 이 지옥에 다른 어떤 육체적 고문 같은 형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서로가 서로의 고문임을 깨닫는다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타인의 시선과 판단이 개인의 자유와 자아 정체성을 억압하는 실존적 고통이라는 뜻.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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