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는 리즈시절.
전화번호 뒷자리도 아니고, 우리집 비밀번호도 아니다. 저번 달까지 주당 근로시간은 68시간이었고, 이젠 52시간이다. 대기업은 탄력근무제, 자율근무제 등 여튼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했고, 몇몇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곡소리를 냈고 청년층은 여전히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근로시간이 줄어든다고 세상이 망하진 않지만, 우리네 삶은 바뀐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바뀌는 걸까?
노동시간은 줄어들었다. 사용자든 노동자든 주어진 시간 내에 빨리 일을 끝내야 한다. 쓸데없는 담배타임은 줄이고, 느슨하던 점심시간은 타이트하게 1시간만 쓴다. 하지만 핵심은 오더다. 예를 들어 예전엔 “응. 그거 시크하고 멋지고 오지고 찰지고 짱구 엉덩이 실룩실룩처럼 그려줘”였다면 이젠 “짱구 엉덩이의 골은 에베레스트처럼 뾰족하게 그려주고 몽고반점은 볼드체로 표시해줘”쯤 되겠다. 회의를 위한 회의를 줄이고, 피드백을 위한 피드백도 줄인다. 업무 가이드라인과 프로젝트 타임라인을 명확하게 해야 내 업무가 명확해지고, 그래야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매일 할 일을 명확하게 숙지해 딱 끝내면, 퇴근하고 일할 일이 없다.
내 설명이 너무 그지 같으면 페친 임형찬님의 글을 보자.
어젠 묘한 날이었다. 낮에는 우진, 창민, 성훈님을 만났고 저녁엔 Writable 4기 쫑파티를 갔다. 우진님은 자유로운 커리어패스의 화신이고, 창민님 역시 이직 경험자시고 성훈님 역시 유연하게 성장하고 있는 곳에 몸을 담그셨고 난 뭐지? 여튼.
대화의 요지는 간단했다. 더이상 나를 설명하는 문장에 직장이 중요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분야에 관심있냐가 더욱 중요해질 거라는 것. 내가 어느 기업에 어느 직위를 가졌는지보다 어느 산업에 관심이 있어서 무슨 일을 꾸준히 했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작당을 하는데...가 아니라 여튼.
나를 봐도 그렇다. 난 자기소개가 어려웠다. 학부생 신분으로 영상 제작을 하며 수익활동도 했고, 활동가로도 불렸고 기냥저냥 기자로도 불렸다. 물론 차카게 살자 콘서트엔 '학생'.
행간을 읽고 그럴싸하게 해석해보자. 우리가 흔히 듣는 ‘직장과 자아실현은 별개야’라는 격언까지 섞어보자. 이젠 프로N잡러의 시대다.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늘어난 내 시간을 활용해 내 관심분야에서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쌓는 것이 ‘이론상’ 가능해졌다. 낮에는 경리였다가 밤에는 뮤지컬 배우일 수 있고, 낮에는 구현모 대리였다가 밤에는 구현모 트레이너일 수 있는 셈이다. 한비야가 지도 바깥으로 행군을 외쳤다면 이제 우린 직장 바깥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그릴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커리어 패스를 고민해주는 커리어 컨설턴트를 넘어 라이프 자체를 그려주는 라이프 컨설턴트 개념이랄까. 더군다나 100세 시대를 맞이했으나 여전히 은퇴 연령은 너무나 빠른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면 직장 바깥에서 나를 어떻게 그리는지는 내 여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한국은 특히나 나이에 집착해서 CEO의 나이는 갈수록 젊어지는데, 자기보다 어린 상사를 모시는 일은 또 문화상 안맞아서 더 빠르게 은퇴할 가능성도 있다. 언론사도 동기 중에 한 명이 사장되면 다 나가지 않는가.
Writable 모임에선 라이딩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전거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을 만났다. 원래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셨는데, 자전거를 너무 사랑하셔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따로 하셨다고 한다. 어디서? 자전거 정비샵에서 말이다. 주 5일 근무하시고, 주 2일은 본인의 취미분야에서 일을 새로 하신 셈. 그리고 자전거 회사에 스카웃당하셨다고 한다.
투잡을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는 직업 한 개만으로도 우리 몸이 거덜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문자 그대로 우리네 저녁시간이 보장된다면 새롭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저녁시간을 잘 활용했다고 소문이 날까?
손학규씨의 저녁이 있는 삶은 집에서 저녁 좀 먹자는 뜻의 슬로건이었다. 주 52시간을 맞이하고, 직장이 나를 지켜주지 않고, 심지어 직무 자체를 바꾸는 경우가 빈번해진 2018년엔 다르게 읽어야 한다. 이제 저녁이 있는 삶은 ‘저녁’은 저녁 시간을 뜻하고,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꽃꽂이 등 취미활동을 할지, 카페가 너무 좋아 카페 알바를 할지, 영화를 읽고 글을 쓰며 이동진을 꿈꿀지 말이다. 자유로운 이직이 아니라 자유로운 전직 그리고 겸직의 시대. 패스트캠퍼스, 탈잉, 크몽 등 직무 교육 플랫폼이 성장하는 이유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작년까진 직장인 or 유튜버였다면 이젠 직장인 and 유튜버인 시대다. 한 명이 다양한 직업을, 삶을 꿈꿀 수 있는 다양한 페르소나의 시대다. 특히 페이스북과 유튜브 그리고 인스타그램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자기 소개를 하고 PR을 하고 브랜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될 테다.
그렇다면, 이 현상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알면 내가 가있지 ㅅㅂ
이 점에서 일자리를 주고, 일을 가르쳐주는 플랫폼이 뜬다. 사실 성공한 플랫폼은 대부분 일자리를 주었다. 유튜브는 유튜버를 만들었고, 카카오페이지는 웹소설가들에게 안정적인 수익을 주었다. 아프리카 역시 BJ라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냈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플랫폼이 아니라 ‘일’을 만드는 플랫폼이 결국에 살아남기 마련이다.
그간 흥한 브런치 및 에세이 흐름을 보면 1) 퇴사 2) 조직문화였다. 그렇다면 미래는 무엇일까? 퇴사 같은 경우 문제로 인한 현상이었고, 조직문화는 문제에 대한 답이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디를 향할까? 개인 창업에 대해 다룰까? 아니면 프로N잡러 시대에 대한 글일까?
아,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개인이 퇴근 이후 자기 계발을 넘어 직장 바깥에서 커리어를 키울 수 있게 돕는 조직이 떡상하리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