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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Oct 19. 2018

제작자의 윤리에 대해

감탄한만큼 좌절했다

제작자의 윤리에 대해.


유명한 의사 겸 작가이신 분이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해자의 담당의사셨다고 한다. 그분이 쓰신 글은 삽시간에 온갖 커뮤니티에 퍼져갔다


그분께서 쓰신 글엔 피해자가 어느 부분에 칼을 맞으셨고, 출혈이 얼마나 심했고, 상태가 어땠는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마나 묘사가 자세하냐면, 커뮤니티에 [혐주의]라는 태그가 달릴 정도였다.


무언가를 만드는 이, 제작자의 윤리에 대해 고민한다. 과연 그 글이 갖고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피해자가 어느 부위에 칼을 맞고, 출혈이 얼마나 심했고, 원한이 아니고서 도저히 생길 수 없는 범죄라고 판단했다는 부연설명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글쓴이 본인마저 본인의 글이 어떠한 공익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밝히고 있지 않는다. 그저 본인의 주관이라고 면피거리를 가져온다.


무언가를 만들 때, 내 언어로 담기는 사람을 생각한다. 사석에서 언피씨한 농담을 누구보다 피씨한 사람들과 낄낄대는 것과 별개로 소셜미디어와 영상 그리고 글에서 언피씨하게 무언가를 담고 싶지 않다. 이는 내가 그들을 그렇게 담기엔 너무나 미안하기 때문이다. 내가 묘사하는 그들 혹은 그들을 담는 언어가 진실을 왜곡시켜 그들에게 무형의 피해를 주지 않을까라는 쫄보의 겁. 내 표현이 누군가를 해치지 않을까라는 걱정. 선을 넘으면서 누군가에게 자극을 주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는, 정치인과 같은 강자가 아닌 이상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남겨진 사람을 생각한다. 고인은 어느 부위에 칼을 맞고, 어떤 상태로 임종을 맞이했는지 알려졌다. 유가족은 소중했던 사람이 얼마나 처참한 몰골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는지 알려지게 됐다. 해당 글을 읽는 사람은 가해자에 분노하고, 피해자를 동정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안타깝게도 그것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썸네일과 자막 따위로 소비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한 번, 남겨진 사람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를 비극으로 떠나보낸 가족들은 어떤 감정일까. 과연 그 의사의 글은 그들을 위로하는 글일까? 혹은 사회 정의 실현에 어떤 기여를 할까?


다시 한 번, 나는 제작자의 윤리를 고민한다. 사회가 제작자에게 부여하는 '선을 넘어도 되는' 부분이 있지만, 이처럼 피해자가 명백한 상황에선 선을 넘어서 무언가를 돕기보다 보수적으로 더욱 더 엄격하게 자기 검열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차라리 경찰에게 협조해서 말하는 게 더욱 정갈하지 않았을까.


언론사에 입사한 친구 중 몇 명은 자살 사건이나 큰사고에도 놀라기보다 특종이냐 낙종이냐를 고민하고 스스로를 기레기라고 자조한다. 다른 기자들보다 빠르게 써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해 윤리 의식은 무감각해진다. 간호사도 마찬가지다. 병동에서 갑자기 사망한 환자를 붙잡고 우는 유가족을 보고 "왜 이렇게 유난이냐"고 혼잣말하는 20년차 간호사도 처음부터 그런 분은 아니었을 테다.


고인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한 의료인으로서, 마지막까지 그를 보살핀 의료인으로서,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간 구성원으로서의 윤리보다 자극을 통해 무언가를 해내려는 약간은 무서운 정의감과 특정 욕구가 더욱 강하지 않았을까.


직업인으로서 윤리에 충실했던 그의 글을 보고 감탄한 만큼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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