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소비자 마인드와 생산자 마인드의 차이가 어떻게 소비 패턴을 결정하는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생산자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생산자 마인드를 갖추지 못하고 소비자 마인드만을 지닌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문제점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우선 생산자 마인드란 무엇일까요? 생산자 마인드는 '생산에 우선순위를 둔 사람의 마음가짐'입니다. 반면에 소비자 마인드는 '소비에 우선순위를 둔 사람의 마음가짐'입니다. 참으로 소박한 정의이죠. 게다가 우리는 생산자이자 소비자이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이 두 가지 정의를 좀 더 다듬어가야 합니다.
생산에 필요한 데 소비의 우선순위를 두는 생산자 마인드
가치 있는 글을 생산하고자 하는 작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생산자 마인드를 갖춘 작가는 어떤 소비 패턴을 갖게 될까요? 그의 최우선 관심사는 가치 있는 글 생산입니다. 이럴 경우,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사용할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생산에 필요한 재화를 사는데 가장 우선순위를 둡니다. 바로 책이겠지요.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는 작가는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빌려보기라도 하겠지만,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작가 지망생이 배를 곯는다고 해서 <안나 카레니나>를 손수 구입하지 않는다는 상상은 하기 어렵습니다.
돈을 써야 할 때는 써야 합니다. 생활에서 기본적으로 나가는 돈이 있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그가 세상에 XX가 유행한다는 이유만으로 관련 제품들을 사는데 돈을 쓰지는 않겠지요. 돈이 차고 넘치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진정 생산자 마인드를 갖춘 사람은 XX에 신경을 쓸 시간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내 소비의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생산자 마인드의 다양한 소비 패턴
저는 모든 인문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생산자라고 봅니다. 몽테뉴처럼 자기 성안에 틀어박혀서 평생 <수상록>만 썼다 하더라도, 그는 그 글을 '생산'했습니다. 본인은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들을 생산했고, 제자들이 그 말들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인도의 벽지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도인은 어떨까요? 그는 가장 가치 있는 정신과 육체를 다양한 수양법을 통해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매 순간마다 더 나은 자신을 '생산'해내지요. 그리고 그를 위해서만 시간과 돈을 소비하겠지요.
심장이 비대해질 정도로 커피를 마셨고, 술과 맛난 음식을 즐겼던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는 어떻습니까? 그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던 생활은 죄다 자신의 문학을 위한 투자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도의 벽지에서 가부좌만 틀었다면, 어떻게 당대 프랑스 사회의 온갖 군상들을 폭넓게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발자크의 엄청난 양의 저술들은 웬만한 작가들 100명 분을 합한 것보다 많지 않습니까? 똑같은 돈을 써도 그냥 지긋지긋한 현실을 잊으려고 먹고 마신 것과는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발자크가 보고 겪은 모든 것들이 그의 방대한 작품들 속에 녹아들어 가 있습니다. 그 돈과 시간을 들여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을 성과이지요. 그는 결국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 돈을 쓸 데 쓴 것입니다. 그조차도 자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 돈을 탕진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생산자 마인드
진정한 생산자는 단순히 생산하는 게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생산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생산자는 그것을 꾸준하게 생산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할 수 있으며 생산해야만 한다는 뚜렷한 목표의식과 드높은 자존감이 없으면, 금세 소비자 마인드로 떨어집니다.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는데 돈을 쓰기보다는, 세상에 유행하는 것들에 돈을 소비하는데 마음이 쏠리지요. 흥미롭게도, 그럴 경우 항상 돈이 부족하게 됩니다. 흔한 말로 '돈이 줄줄 새게' 되지요.
그런데 생산자 마인드가 중요하다고 해서, '생산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 생산됩니다. <소소하게, 독서 중독>의 저자인 독서광 김우태 씨도 말하듯이, 미어터질 정도로 책을 씹어먹고 나면 이제 자연스럽게 글을 '토해내게' 됩니다. 내가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고 그 주제가 가치 있다고 여긴다고 해서, 그 관심사에 대한 결과물이 금방 나오지는 않습니다. 과일이 익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요. 결국 우리는 슬로 라이프로 돌아오게 됩니다. 진정한 생산자는 생산물을 억지로 짜내지 않습니다. 그는 기다릴 줄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판단하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나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조차도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노마드와 생산자 마인드
저는 학자란 본질적으로 노마드(유목민)라고 생각합니다. 공자와 맹자는 춘추전국시대에 천하를 돌아다녔습니다.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을 펼친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습니다만, 그들 또한 이리저리 떠돌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처와 그의 제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육체가 아닌 정신이 노마드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과학자를 예로 들자면, 스티븐 호킹은 휠체어에 앉아서 온 우주를 돌아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모두 인류 역사에 남을 가치 있는 것들을 생산해냈지요. 이제 IT 시대가 되어, 노마드 앞에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하나 더 붙었을 따름입니다. 디지털 노마드라고 해서 딱히 더 멋지고 그런 건 없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디지털 노마드는 공자나 맹자, 예수나 부처가 누리지 못했던 엄청난 기회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산물'은 단 몇 초만에 전 세계로 퍼져나가니까요.
나가며
생산자 마인드와 소비자 마인드는 각각 삶을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를 의미합니다. 생산자 마인드는 능동성을 대표한다면, 소비자 마인드는 수동성을 상징합니다. 생산자 마인드는 나답게 내가 필요한 것에 소비하자는 마음가짐입니다. 반면에 소비자 마인드는 내게 필요 없더라도 세상에 유행하는 것들에 소비하라고 부추깁니다. 생산자 마인드는 판매자 마인드와도 연결됩니다. 생산자가 판매자의 마인드를 갖추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이기심보다 타인의 욕구에 관심을 갖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생산하고자 하면서도, 타인과 어떻게 소통하고 그들의 가치를 높여줄까 하는 관심을 놓지 않습니다. 소비자 마인드는 타인이 원하는 바를 살피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내가 무엇을 소비할까에만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지요. 이와 같은 유아적 마인드는 소비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인문학자가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겠다는 생산자 마인드를 갖추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아무도 읽지 않지만 교수 임용에만 도움이 되는 논문들을 쏟아내느라 생산적인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본인도 자신의 논문이 가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치 있는 인문학을 생산하겠다는 의지조차 없다는 점입니다. 그에게는 생산의 즐거움도 없습니다. 여러 학회를 쫓아다니며 인맥을 쌓고 그 학회가 발간하는 등재지에 논문 게재 기회를 얻느라 애씁니다. 자신의 인문학적 성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술자리, 인맥관리 등에 돈과 시간을 탕진합니다. 논문을 쓰고 나면 다시는 들여다보지도 않을 책들을 사느라, 인문학의 정수를 담은 책들을 살 돈이 없습니다.
나답게 생산한 생산물은 앞서 살펴본 이키가이 다이어그램의 중앙에 자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잘하는 것''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돈이 되는 것'을 모두 포함해야 합니다. 앞선 세 가지가 충족되면, 네 번째 것은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난 글에서 밝혔습니다. 진정한 생산의 기쁨을 위해, 인문학 하는 이들이 생산자 마인드를 갖춰나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보며, 토요일 주말 아침 에세이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