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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교수의 <논어> 오독

강의를 준비하던 중에 나는 우연히 <그림자 : 우리 마음 속의 어두운 반려자>(한길사: 1999)를 접하게 되었다. 저자인 이부영 교수는 한국에서 융 학파의 태두이며,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신경정신과장을 지내셨고 1977년에 정년 퇴임하셨다고 한다. 참으로 훌륭한 학자이시고, 오늘날에도 그분의 영향력이 심리학계에서는 거대할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이부영 교수께서 <동양종교와 그림자의 인식>이라는 장에서 보여준 <논어>에 대한 이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슬프게도, 절대다수의 유학자들의 선행 연구가 이부영 교수를 저와 같은 오독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 헷갈릴 정도이다. 필자는 성선설에 입각해서 이부영 교수와 같이 뛰어난 분이 어째서 <논어>를 오독했는가를 간략히 짚고자 한다.


[272쪽] "군자와 소인의 대비는 도덕적으로 성숙한 인간과 미숙한 상태의 인간을 비교한 것으로 교육상으로 설득력 있는 매우 명료한 구분이며 실천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가 <논어>에서 소인은 군자가 될 수 없는 존재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소인의 발전 가능성을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는 인상이며 이 또한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 [내 설명] <논어>에서 군자는 본성에 따라 바르게 알고 사는 사람이며, 소인은 본성에 대한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소인이 군자로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는 나 자신이 생각을 바르게 하면 군자요, 한시라도 생각을 틀리게 하면 소인이다. 즉 성선설에 따라 군자로 태어난 공자도 생각을 잘못하면 한 순간에 소인배 행세를 하게 된다. 소인배라는 인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잘못된 생각을 갖고 살면 소인처럼 사는 것이다. 소인은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다. 인식론적 개념이다. 소인은 물론 군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소인이 따로 있고 군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군자로서 사는 한 나는 소인이 아니며, 내가 소인으로 사는 한 나는 군자가 아니다. 내가 소인이며 동시에 군자일 수 없다. 하지만 이부영 교수는 마치 소인에서 군자로의 진보를 생각하는 듯하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현실태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논어 해석의 틀로 들고 온 아주 전형적인 오류이다.


[274쪽] "조선왕조 500년간 유교적 명분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역사를 볼 때, 명분, 즉 페르소나에 가려진, 유교가 일찍 다루기를 회피해온 괴력 난신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의 심층에서 의식의 체면을 거역하도록 준비해왔던지를 직접 목격할 수 있다."


=> [내 설명] 이부영 교수는 명분=페르소나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명분을 거꾸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명분이라는 개념을 '현실과 괴리된 이상, 겉치레, 사회적 위치를 감안한 형식' 등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부영 교수 또한 오해한 듯하다. 유학의 명분은 본심을 감춘 변명 따위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적합한 사람다운 주장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짓을 하지 않으면서 내세우는 명분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올바른 명분 하에 온갖 변명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 공자와 맹자의 주장이다. 유학의 명분은 결코 칼 구스타프 융의 페르소나가 아니다. 페르소나 이론의 옳고 그름을 논할 생각은 전혀 없다. 유학을 전공한 박사로서 나는 유학의 명분이 융의 페르소나 이론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만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274쪽] 신유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사단칠정 론도 사단으로 대변되는 선한 감정과 칠정의 일반적인 감정의 구분을 통해서 감정적 승화를 꾀하고 있는데서 열등한 것을 포함한 일반적인 감정 세계가 고상한 감정의 그림자로 간주될 소지를 안고 있다.


=> [내 설명] 퇴계는 사단칠정론의 핵심을 담은 <성학십도-심통성정도>에서 사단과 칠정이 모두 선한 감정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선한 감정 / 일반 감정의 이분법은 사단칠정론의 원문에 대한 오독이다. 칠정은 열등한 감정이 아니라,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감정이다. 내 감정이 무시당하고 상처받았기 때문에 내 감정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을 칠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퇴계학자들도 사단칠정을 "도덕감정/자연감정" 등으로 이분화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전형적으로 무의미한 언어유희이다. 퇴계는 결코 감정을 이렇게 구분한 적이 없을뿐더러, 이와 같은 이분법은 자연에도 맞지 않고 주자학의 분류법도 아니다. 왜냐하면 주자학은 자연법칙(원형이정)이 인간의 본성(인의예지)이 되어 도덕 법칙으로 작용한다고 분명히 못 박았기 때문이다. 주자학에서 자연과 도덕은 두 가지가 아니다. 독자들이 주자학의 이와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주자학에서는 적어도 자연과 도덕이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20세기의 해석자들이 주자학을 모조리 왜곡시켰고, 한문에의 접근이 어려운 타 분야의 우수한 학자들이 해석자들의 글을 참고로 함에 따라서 왜곡의 범위는 확장 일로에 있다.


나는 감히 한국 심리학계의 거두인 이부영 선생님을 폄하하기 위해 이와 같은 글을 쓴 것이 결코 아니다. 어쩌면 내 화살은 타 분야의 거두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내 분야의 학자들에게 향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점을 지적하는 글은 기득권들이 득실대는 학회지에서 받아주지도 않기 때문에, 브런치에서나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본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참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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