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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Jan 23. 2022

4.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멸치와 진미채 볶음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초등학생 시절 소풍 가는 날 다들 각기 다른 색의 김밥을 들고 올 때 내 도시락은 늘 네모나게 썰은 햄과 밥, 진미채 볶음, 멸치 볶음, 그리고 밥 위에 올린 계란 프라이였다. 어떻게 보면 집에서 아침에 먹은 반찬과 다를 게 없기도 했는데 나는 그 도시락을 고수했다. 아니, 그보단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티 내고 싶었던 것 일지도. 다들 겨루기 하듯 예쁘고 정갈한 도시락을 싸올 때 그 경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할머니의 온기가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반찬이 상에 오르내리곤 했지만  멸치볶음과 진미채 볶음은 늘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자주 할머니랑 같이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긴 멸치 대가리와 내장을 땄던 거 같은데 근래엔 기억이 흐릿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멸치볶음(할머니)과 진미채 볶음(엄마) 담당자가 나눠져 있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미묘하게 보이지 않는 선을 고수하며 서로의 영역을 넘지 않는다. 할머니가 한 멸치 볶음은 여러 버전을 거듭하다 현재는 기름을 두르지 않고 멸치를 볶은 후 호두를 넣고 함께 볶다가 불을 끄고 식었을 때 설탕을 살짝 뿌려 그 상태로 식혀 마무리하는 레시피로 자리 잡았다. 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 한번에 많은 양의 반찬을 만들어 놓고 오래 보관하곤 하는데 이 방식이 냉장고에 넣어놓아도 눅눅해지지 않고 길게 제맛을 유지한다나. 나는 멸치랑 호두를 씹었을 때 녹지 않은 설탕과 함께 '사각'하고 씹히는 느낌이 좋다. 


내가 해외에 나가 길게 집을 비우곤 할 때 김치는 냄새난다며 투덜거리는 나에게 늘 할머니는 진미채 볶음과 멸치 볶음을 싸주셨다. 매번 집을 떠나기 전 지겹던 할머니의 '밥 먹었냐'는 질문과 식구가 많아 왁자지껄 하던 집안의 분위기는 타지에 도착하는 순간 그리움이 스멀스멀 차올라온다. 바리바리 챙겨 온 캐리어를 풀며 구멍 뚫릴 수도 있다며 두 번 꽁꽁 묶인 비닐봉지를 풀어낸다. 아껴 먹는다고 소분해놓고 매일 저녁 반찬으로 조금씩 먹으며 집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게 내 여행 루틴이 되어 버렸다. 몇 번 이 상황을 반복하고 자주 여행을 다니는 나는 왜 여행을 다니곤 할까 고민하곤 했는데 결론은 '집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함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늘 곁에 있던 것에 감사함이 무뎌지곤 한다. 그러다 사라지고 나면 오는 허무감 속에서 무언가 되돌아볼 수 있는 추억거리가 있다면 순간 그 시간으로 잠시 돌아갔다 오면서 위로를 받곤 하는데 내게는 음식이 그러하다. 늘 할머니의 음식을 잊고 싶지 않아 배워야지 생각하다가도 핑계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할머니 밖에 할 수 없는 음식을 먹는 순간을 고수하고 싶기도 하다.  언젠가 할머니가 없을 그날이 오면 할머니의 음식이 무척이나 그리워질 것 같다. 그렇다고 애매하게 내가 흉내 내어도 되는 걸까 생각에 잠길 때가 있지만 이것 또한 나의 게으름을 대변하기 위한 하나의 변명이겠지. 아무래도 올해 버킷리스트에 '할머니 반찬 배우기'를 꼭 추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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