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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Feb 20. 2022

6. 여름날 달달한 비빔국수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여름 방학. 방학만 되면 할머니의 가장 큰 고민은 “오늘 점심은 뭘로 해먹을꼬?”였다. 밖에서 대부분의 밥을 처리하는 지금을 생각하면 영양사도 아닌 할머니가 매일 아침, 저녁도 모자라서 점심메뉴까지 고민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였을 것 같다. 5일에 하루는 보통 나름 특별한 메뉴 -자장면, 치킨, 피자 등 을 시켜먹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해치웠던 것 같은데 아침도 밥, 저녁도 밥이라는 고정메뉴 사이에 무언가 색다른 음식을 점심 메뉴 (그마저도 돌려막기였지만) - 주로 국수, 스파게티, 덮밥 등- 로 선정하는 게 암묵적인 합의였다. 겨울방학에는 따뜻한 멸치국수, 여름방학에는 시원한 비빔국수를 자주 해주시곤 했다.


보통 동생과 삼촌은 멸치국수, 나는 멸치 맛과 국수가 어우러지지 않는다고 느껴져 비빔국수를 먹고싶다고 했는데 덕분에 할머니는    요리를 해야 했다. 약간의 핑계아닌 핑계를 덧붙이자면 치국수는 혹시나 저녁에 삼촌이 퇴근하고 배라도 고파질까  노심초사하시는 할머니가 상시 냉동시켜놓은  멸치 육수를 녹여 끓인  삶은 소면만 넣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지금은 요리를 머리로만 해본자의 오만이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빔국수 레시피는 단맛 하나도 설탕보단 사과를 갈아 넣어 내는 엄마버전과 설탕이 잔뜩 들어가는 할머니 버전으로 나뉘는데 할머니 버전은 기본적으로 양푼에서부터 시작된다. 손이 큰 할머니는 늘 소면을 한 손 가득 쥐고 폴폴 끓는 물에 집어넣어 흰 거품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즈음 소금을 살짝 넣고 찬물을 조금씩 나눠 부어 거품을 없앤 뒤 바로 찬물에 헹궈 준다. 쫄깃해진 면발을 양푼에 던져(덜어) 넣고 참기름, 깨, 고추장, 설탕등을 (내가 보기엔) 끌리는 대로 대중없이 넣어주고 할머니의 두툼한 손으로 조물조물 버무려준다. 그 위에 얇게 썰은 아삭한 오이를 얹어주면 끝. 때때로 삶은 달걀이나 김치, 골뱅이를 곁들이면 색다른 느낌.


장거리를 하고 있어 한 달에 한번 정도 남자 친구를 만나러 먼 길을 내려가서 며칠 지내다 보면 할머니의 비빔소면이 생각날 때가 있다. 내 머릿속에 눈감으면 생생히 그려지는 레시피로 소면을 끓이고 양념은 자신이 없기에 시중에 파는 소스를 사서 자신 있게 비빔소면을 만들고 한입 뜨자마자 어라,.. 할머니가 해준 음식 중에 제일 쉽다고 손꼽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신감이 스쳤다. 부들부들 양념 잘 밴 소면의 맛은 어디 가고 얇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듯 양념에 베어 들기를 거절했다. 처음이라 그런 거라고 나 자신을 다독였지만 두 번째도 덜 밍밍할 뿐 할머니가 할 때에만 맛을 내기로 전속 계약을 한 것인지 근본적인 맛의 변화는 없었다. 갑자기 생활의 달인에서 레시피를 당당하게 모두 공개하던 달인의 대사가 생각났다. “다 알려줘도 어차피 이 맛 못 내요.”


비빔 소면아 얕봐서 미안해. 이번에 올라가서는 할머니한테 비빔소면 만드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다고 다짐하는 한 주 끝자락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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