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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문과생, 화학과의 조우

by 담백

선생님의 질문이 내 전두엽을 강타하던 그날, 내 대답은 우리 엄마의 전두엽을 정통으로 가격한 듯했다.

“제 꿈은 래퍼 아니면 만화책방 주인이에요.”

일면식도 없던 선생님 앞에서 평생 동안 숨기고 싶은 비밀이 들통난 듯 사색이 된 엄마는 깊은 심연 속에서 끓어오는 화와 어이가 상실된듯 기묘한 조합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생님은 내 대답 자체 보다도, 무심코 던진 질문 하나로 불붙은 이 모녀의 살 떨리는 대치 앞에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였다. 정해진 답은 없다지만 그 후 몇 분간 흐른 정적이 그 방 안을 더 무겁게 눌렀다. 애초에 의도했던 대화의 방향조차 의미 없어짐을 느낀 선생님은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하셨다. 그렇게 엄마와 둘만 남은 방은 난방을 끈 한겨울 아랫목처럼 한기가 맴돌았다.


사춘기의 호르몬은 꼭 말도 안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도록 부추기고선 사라져 버리고, 홀로 남겨진 나는 매번 후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길 반복했다. 이제 그녀의 화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분출뿐이었다. 결국 엄마는 집 앞에 무대를 차려주겠으니 그렇게 잘하는 무대를 당장 보여주라며 쏘아붙였고, 만화책방 주인은 아무나 하는 줄 아냐며 나를 몰아세웠다. 성난 황소로 변한 엄마 앞에서 도끼눈을 떠보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에 젖은 생쥐처럼 눈물만 뚝뚝 흘렸다.


머리를 맞은 건지 그날 이후 어떻게 대화가 전개됐는지는 선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선생님과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그 어려운 학력고사 시절 과외 한번 받지 않고 오직 독학으로 서울대를 입학한, 한마디로 개천의 용이었다. 당시는 대학원생 신분이라 아기 분윳값을 벌러 잠시 과외를 시작했다지만 나처럼 가망 없는 학생을 말도 안 되게 양심적인 금액에 수업하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쉽게 성사될 수 없는 만남이었다. 선생님과의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 반씩 진행됐는데, 교재가 있었음에도 책을 펼치지 않은 채 수업을 진행했다. 어차피 성적엔 관심이 없는 학생인 것을 알기에 메인 과목인 국, 영, 수, 사, 과의 성적을 잘 나오는 일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느끼신 듯했다. 교과 과정에 얽매이기보다 선생님은 내가 어디에 흥미를 느끼는지 발견해 내가 공부를 하기 위한 "명분"을 찾는 일에 초점이 맞춰졌다. 논어를 읽기도 하고, 사자성어를 공부하는가 하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 등에 대해 나의 생각을 계속 물어봐 주셨다.


남들은 말도 안 된다며 왜 쓸데없는 생각을 하냐고 무시당했던 이야기들 조차 선생님은 어느 정도 논리만 맞다면 끝까지 귀 기울여 주시곤 했다. 물론 서울대는 닮을 수 없겠지만, 그렇게 점점 나는 미래에 어른이 된다면 누군가에게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았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닮고 싶은 어른, 인생에서 모토를 만난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그간 어떤 사람에게도 답을 얻을 수 없던 엉뚱한 질문들에 결코 화내는 일 없이 언제나 깊은 고민과 통찰이 담긴 답변으로 내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만들어 주셨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나는 이런 과정을 다 알면서도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선생님을 믿고 온전히 그 시간을 집중하게 지원해 준 엄마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시절 성적이 32등에서 28등으로 올라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 성적표를 내보이던 날, 손녀바보였던 할아버지께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나선 단 한 번도 성적표를 집에 들고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도 그다지 나의 성적을 궁금해하는 거 같진 않아 보였다. 고등학교 입학 후 2학년으로 진급하기 전까지 약 4번에 걸쳐 문·이과 진학 설문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때만 해도 학교의 60% 는 큰 고민 없이 문과를 선택하던 시절이었다. 요즘에야 이과를 가야 취업이 잘된다는 조언이 나뒹굴지만 그 시절엔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그렇게 딥한 생각을 하며 문, 이과를 선택한 학생이 몇이나 됐을까 싶다. 나 또한 이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선생님과 만난 시점이 대략 3번째 설문 또한 당연하게 문과로 제출하고 난 시점이었다.


선생님은 또 허를 찌르는 질문을 날리셨다.

“왜 문과를 가려고 하니?”

또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성적은 뒤에서 순번을 가릴 수준이었고, 특히 수학성적은 더더욱 절망적이었기에 이런 상태에서 이과를 선택하는 일은 당연스레 주제넘는 일이라 여겼던 듯하다. 그럼 만약 내가 이과를 간다고 가정한다면, 왜 이과를 가야 하는가? 과연 수학이라는 한 과목으로 이과를 가지 않겠다고 단정 짓는 게 맞을까?라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질 즈음, 선생님께서 과학 공부를 시작해 보자고 제안해 주셨고, 생에 첫 선행학습을 시작했다. 시험을 잘 치기 위한 선행학습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걸 알기 위한 선행학습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가짐이 달라졌다. 우선 공부하는 내용에 대해서 순수한 궁금증이 순풍을 타듯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목적성이 뚜렷할 때 열정이 생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본연의 궁금증이 솟아나야 열정으로 번져나가는 사람이었다.


흥미가 있다고 성적이 잘 나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것이 재밌는 걸 알았다면 그 나름대로 성장인 것을. 일단 나에게는 이런 기폭제가 필요했다. 여러 과학 과목 중에서도 화학 과목이 가장 끌렸는데, 설명을 읽고 들었을 때 머릿속에 상황이 제일 잘 그려지기도 하고 우리가 보는 모든 물질들이 알고 보면 작은 알갱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 나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 흥미로워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저, 아무래도 이과 갈래요."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으셨다.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일이 이렇게도 마음의 안정감을 주는 일이던가. 4번째 설문을 하러 학교를 가던 날, 그 어느 때보다도 발걸음도 가벼웠다. 집에 돌아와 이과를 선택했다는 나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엄마의 표정을 보는 일도 묘하게 즐겁고 뿌듯했다. 더군다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선택으로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게 새삼스럽고 설렜다. 그렇게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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