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내 꿈을 궁금해하지 않았던 시절
책 제목에 대놓고 나타내긴 조금 부끄러워 영, 수포자라고 표현했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국, 영, 수, 과포자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한치의 거짓도 가미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 입시의 입문과도 같은 고등학교 3학년 3월 모의고사에 국, 영, 수, 과탐 2과목 순서대로 - 6,7,8,7,8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위기의식도 느껴지지 않던 나는 차라리 1열로 같은 숫자로만 냈어도 이거보단 좋은 성적을 거뒀을지도 모르겠다며 친구들과 시시덕거렸다. 그때까진 몰랐다. 이 성적이 나에게 어떤 쓰나미를 몰고 올지.
어떻게 16년을 살면 이런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그간 걸어온 삶을 살짝 읊어보자면. 우선 기본적으로 책을 5분 정도 읽다 보면 침을 흘리며 잘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딥슬립이 가능한 사람이었고(이것도 능력이려나) 그리고 계속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는 타입이었다. (한 줄도 집중해서 읽지 않았다는 뜻) 자랑은 아니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시절 인터넷 소설들은 몇십 권을 과몰입해가며 독파했다. 초등학교 때는 정말로 뛰어놀기 바빴다. 모든 부모님들이 그렇듯이 대략 6살경까진 엄마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피곤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지만 늦은 시간, 퇴근하고 돌아오면 늘 동그란 책상 앞에 나를 앉히고 색지카드를 코팅해서 영어 단어를 외우게 했고, 몸이 축축 늘어지는 나를 데리고 오 줄 선지 공책에 영어 스펠링 쓰기를 엄마 마음에 찰 때까지 선에 맞춰 정자로 쓰는 연습을 반복하곤 했다. 구몬, 기탄수학 같은 학습지부터 피아노, 태권도, 미술, 수영 등 그 시절 유행하던 사교육은 한 번씩은 경험했다. 그럼에도 교과서를 포함해 참고서적에 단 한 권도 내 필기가 없는 일이 여러 해 반복되자 엄마는 그제야 내 아이는 영재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머리를 쓰는 일 보단 머리를 쓰지 않고 물 흐르듯 살기를 지향했다. 엄마는 부모님들 모임에 가서 나를 이렇게 포장했다. ‘우리 딸은 공부는 못해도 참 착해요’. 맞다. 정말 지독하게 착한 아이긴 했다. 친구가 마시다 말고 버리려던 요구르트 병을 집까지 들고 오는 새나라의 어린이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체육복을 전교생에게 빌려주기로 유명해서 내 이름보단 내 사물함이 더 유명세를 떨쳤다. 절대 타의가 아니라 자의로 행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남들이 보기엔 정말 ‘무식하게’ 착하다고 할진 몰라도 그렇게 많은 인원이 빌려갔는데도 돌고 돌아 내가 사용할 시점엔 늘 제자리에 돌아와 있는 체육복을 보며 인류애를 느끼는 스타일이었다.
유난히 내성적이어서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일이 싫었고, 또 내가 너무 아끼는 친구들과 공부 가지고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애매하게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이 밑바닥을 깔아줘서 주변 친구들이 나를 디디고 올라 원하는 성적을 얻길 바랐다. 난 어떻게 되던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이 소극적인 성격으로 학교라는 좁은 사회를 견디며 하루하루 학교에 등교하는 일만으로도 나에겐 벅찼다. 덧붙이자면 우리 가족은 겉으로 보기엔 3대가 화기애애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늘 크고 작은 일들로 고부갈등, 형제갈등, 부부갈등이 이어졌기 때문에 그 어린 나이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싸움을 중재하는 일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습득력이 느린 건지, 10월생이라 성장이 더뎠던 건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공부와는 지독하게 담을 쌓았다. 구몬 학습지를 풀기 싫어 한 장, 두 장 뜯어 벽과 장롱 뒤편 사이 공간에 쑤셔 넣기를 반복하다 선생님이 묵인하고 넘어가주시는 순풍을 타고 점점 스케일이 커져 학습지 한주 분량의 1/2를 넣기도 했다. 어느 날 튀어나와 있던 한 장의 학습지 끝부분을 할머니가 뽑아내던 날, 실밥이 풀리듯 우수수 떨어지는 학습지 세례에 밤새 엉엉 울며 그간 안 풀고 숨겨놓은 학습지를 풀때까지 몇날 밤 잠을 잘 수 없던 세드 엔딩으로 끝나버렸지만. 하여튼 공부머리보단 잔머리가 기가 막히게 발달한 편이었다. 학원숙제를 하기 위해 답지를 샀고 답지를 베끼면서도 다 맞추기보단 제일 간과하고 넘어가지는 75% 의 정답률을 유지했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 보단 어떻게 하면 더 ‘안 할까’에 특화된 내 자신의 모습에 으쓱하던 내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많은 사교육을 거쳤지만 그나마 눈에 띄던 건 미술(그마저도 다른 것에 너무 재능이 없어서이겠지만) 쪽이었다. 아마도 미술은 점수를 매기는 경쟁보단 각자의 특성에 맞게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 사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해 노트 한구석에 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거나 친구들을 그려주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림을 그려주면 좋아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 좋았고 아빠의 외관은 닮길 거부했지만 재능을 조금은 이어받은 것 같아 한편으론 뿌듯했다. 그즈음 내 꿈은 자연스레 디자이너였다. 사춘기 시절 유일하게 나의 편이 돼주었던 할아버지가 그 꿈을 반대하시기 전까진. 그랬다. 나에겐 할아버지의 말이 절대적이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할아버지 말을 이길 정도로 하고 싶었던 꿈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꿈을 거절당하고 물론 아무도 공부에는 1도 관심 없는 나에게 꿈을 묻는 이도 없었거니와 나마저도 내 꿈이 불분명해졌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나를 거의 포기한 줄 알았던 엄마가 과외선생님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뿌리 박혔는지 모를 선입견에 남자과외선생님이라면 치를 떨던 나에게 동생이 던진 한마디가 마음을 울렸다. “누나, 지드래곤이 과외해 준다고 해도 남자과외선생님이라고 거절할 거야?”,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감히 누구라고 지드래곤을 거절하겠는가. 그러나 막상 도착한 선생님은 죄송하지만 지드래곤과 자그마치 지구 끝과 끝정도의 갭을 보여주셨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 끝이 만나 지드래곤 정도의 여파를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생님과의 주옥같은 첫 만남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내 인생을 바꾼 질문을 던지셨다. “ㅇㅇ야, 넌 꿈이 뭐니?”. 듣자마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 말에 담긴 진심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져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웠던 마음과 가볍게 입은 아무렇지 않은 척 우물거렸다. “제 꿈은 래퍼 아니면 만화책방 주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