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림자 옷을 입는

촬영장에서, 혹은 새로운 일에 앞서서

by 청년실격
2025-06-18 07_21_21-HairstylistRosie_ Vision Board에 있는 핀 - Chrome.jpg

코난 속 범인은 그림자다. 나는 중대한 범죄는 (아직은) 저지른 적 없지만 촬영장만 가면 그림자가 된다. 늘 같은 출근복이다. 검은색 슬랙스, 검은색 티셔츠, 검은색 자켓, 그리고 검은 구두. 전신을 검게 물들인 게 코난속 범인 같다.


사진작가만 검은 옷을 입는 건 아니다. 촬영 헬퍼도, DVD도, 아이폰 스냅도 올블랙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역할을 맡고 있지만 같은 유니폼을 입는다. 검은 옷은 상징이다. 우리가 이 파티의 손님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초대받은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을 구분 짓는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동시에 눈에 띄어야 하기 위해 검은색을 입는다.


처음엔 낯설고 힘들었다. 검은색 옷 입는 게 힘들었다는 건 아니고. 그 낙차감이. 이 일을 하기 전에 나는 결혼식장에서 대접받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기쁨을 함께 축하하고, 환대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사회자에겐 늘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기꺼이 축하를 주는 자리였다. 엘레강스하고 고상하게 좋은 옷 입고.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한 이후엔 같은 장소에서 다른 계급으로 서 있다. 조명도 받지 못하고, 이름도 불리지 않으며, 셔터 소리만 찰칵찰칵 낸다.


때로는 그 위치에서 오는 미묘한 모욕도 있다. 지나가는 어른들의 찍새라는 말. 아주 얕은 농도의 무시와 경계가 섞인 태도들. 예식장 직원들의 사소한 짜증도.

한편으론 이해도 된다.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고, 그저 조용히 장면을 기록하러 온 노동자이니까. 컨디션 좋은 날에는 으쓱하고 넘기지만 사회적 체력이 다 하는 날에는 긁힐 때도 있다.


그럼에도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결혼식장에서 환영받는 사람이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 일을 하고 있고, 또 이 일을 잘하고 싶고,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대 속에서 촬영장을 간다. 그러니 좋은 의미에서 이건 내가 자초한 일이다.


검은 옷은 갑옷이 된다. 무례한 말을 견디는 내성이 된다. 세상은 아주 공평하고 우주는 균형과 질서를 좋아해서, 좋아하는 게 있으면 안 좋은 게 꼭 그만큼 있다. 그러니 이 정도 홀대로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싸게 값 치르는 셈이다.


그림자가 된다는 건 단지 식장에서 어두운 옷을 입는다는 건 아니다. 또 다른 의미도 있다. 그건 어떤 일을 잘하고 싶다면, 그 일의 초보자일 때를 견뎌야 한다는 점이다. 훗날 받게 될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그림자를 미리 선결제하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촬영이 끝난 후 아쉬운 피드백을 받을 때가 많다. 혹은 누가 혼내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결과물에 아쉬울 때 많다. 그럴 때마다 속 쓰리지만, 동시에 안도감과 희열도 느낀다. 스스로가 부족하고 아쉬운 꼭 그만큼 더 성장할 공간이 남아있다는 걸 테니까.

그러니 나한테 그런 "그림자"의 시기는 귀하다. 말하자면 어떤 일의 초입에서 허둥지둥하는 내 모습을 견딜 수 있는 시기. 거기를 못 견딘다면 새로운 일은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고, 거꾸로 그거만 견딜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도 있을 테고.


오늘도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조용히 촬영장에 간다. 입장할 땐 아무 말 없이, 퇴장할 땐 더 조용히. 주말 오후, 촬영을 마치고 지하철역을 향해 걷다 보면 검은색 동지들을 마주친다. 마치 조문을 다녀오는 사람들처럼 검은 옷에 큰 캐리어, 무거운 표정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오늘도 고생했다고 말을 하진 않는다. 그저 그도 오늘은 어느 축제에서 그림자가 됐었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 혼자 내심 은밀한 동지애를 느낀다.

keyword
이전 09화1-8) 메인 작가 데뷔를 앞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