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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검은 옷의 그림자가 되는 일

촬영장에서, 혹은 새로운 일에 앞서서,

by 청년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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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 속 범인은 그림자다. 나는 중대한 범죄는 (아직은) 저지른 적 없지만, 촬영장만 가면 그림자가 된다. 늘 같은 출근복이다. 검은색 슬랙스, 검은색 티셔츠, 검은색 자켓, 그리고 검은 신발. 전신을 검게 물들인 게 코난속 범인 같다.


사진작가만 검은 옷을 입는 건 아니다. 촬영 헬퍼도, DVD 팀도, 아이폰 스냅 작가도 올블랙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역할을 맡고 있지만 같은 유니폼을 입는다. 검은 옷은 무언의 표식이다. “우리는 이 파티의 손님이 아니라, 이 파티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리고 눈에 띄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검은색을 입는다. 그저 조용히, 그러나 치열히 일하는 걸 밖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촬영장에서 그림자가 되는 일은 남의 인생 파티에서 조용히 일하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처음엔 그게 낯설고 힘들었다. 이 일을 하기 전에 나는 항상 결혼식장에선 하객이었다. 누군가의 기쁨을 함께 축하하고, 환대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결혼식장은 내가 손님이고, 대접을 받는 자리고, 기꺼이 축하를 주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한 이후엔 같은 장소에 있지만 전혀 다른 위치에 서 있다. 조명도 받지 못하고, 이름도 불리지 않으며, 셔터 소리만 찰칵찰칵 들린다.


때로는 그 위치에서 오는 미묘한 모욕도 있다. 지나가는 어른들의 “찍새”라며 내뱉는 말, 무시와 경계가 섞인 태도들. 예식장 직원들의 사소한 짜증까지.

한편으론 이해도 된다.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고, 그저 조용히 그 장면을 기록하는 입장이니까. 컨디션 좋은 날에는 으쓱하고 넘기지만 사회적 체력이 다 하는 날에는 긁힐 때도 있다.


하지만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결혼식장에서 환영받는 사람이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지금 사진 일을 하고 있고, 또 이 일을 잘하고 싶고,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확신 속에서 매주 촬영장을 간다. 그렇기 때문에 검은 옷은 갑옷이 되고 그림자가 되는 건 일종의 체력이 된다. 무례한 말을 견디는 내성이 된다.


그림자가 된다는 건 단지 식장에서 어두운 옷을 입는다는 건 아니다. 또 다른 의미도 있다. 그건 어떤 일을 잘하고 싶다면, 그 일의 초보자일 때를 견뎌야 한다는 점이다. 훗날 받게 될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그림자를 미리 선결제하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촬영이 끝난 후 혼이 난다. “왜 이렇게 찍었냐”, “이 구도는 왜 이랬냐.” 그럴 때마다 속이 쓰리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희열도 느낀다. 내가 아직도 배우고 있고 성장 중이라는 분명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피드백이 귀하다. 좋은 결말을 위해서는, 그런 그림자 시기를 잘 견뎌야 한다. 그 시기를 못 견딜 거 같다면 새로운 일은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을 테니까.


오늘도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조용히 촬영장에 간다. 입장할 땐 아무 말 없이, 퇴장할 땐 더 조용히. 주말 저녁, 촬영을 마치고 지하철역을 향해 걷다 보면 검은색 동지들을 마주친다. 마치 조문을 다녀오는 사람들처럼 검은 옷에 큰 가방, 무거운 표정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말을 하진 않는다. 그저 그도 오늘은 어딘가에서 그림자가 됐었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 혼자 내심 은밀한 동지애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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