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HCN] TM 영업기획/운영
개성은 모르겠지만 나는 진짜로 특기사항이 몇 개 있다. 비밀이지만 특별히 그중 하나만 현대에게 공유한다.
나는 비를 가장 먼저 맞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이고 나는 진지하다. 왜 친구들 중에 "어? 비 온다"를 외치는 친구 한 명 있지 않은가. 그게 나다. 만약 내가 당신의 친구고, 비 내리는 날에 같이 있다면, 가장 먼저 비 소식을 알리는 건 나다. 일기예보 같은 거시적인 예측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비가 언제, 얼마나 올진 모른다. 그건 기상청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딱 첫 번째 빗방울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그 첫 방울을 맞는다. 보통은 내 머리 위나 앞에 떨어진다. 나는 지금껏 한 번도(까진 오버고 그래도 거의) "어? 비 온다"라는 말을 뺏기지 않았다. 아마 어디서 비 깨나 먼저 맞는 사람도 여지없이 선수를 뺏길 거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라는 말은 이제 "청년 실격 앞에서 비 먼저 맞는다"란 말로 재해석돼야 한다. AI가 소설도 만드는 세상인데, 이건 약소한 능력이지 않은가.
근데 뭐 당연한 거겠지만, 실제로 비가 내 앞에 가장 먼저 떨어지진 않을 거다. 비가 떨어지던 중 "오늘은 저 쪽에 있다"라며 방향을 트는 게 아니고서야 빗방울은 공평하고 무작위 하게 떨어진다. 내가 비를 가장 먼저 맞는다고 주장하는 건 단지 그걸 먼저 발견하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아주 예민해져 있다. 내가 비에 예민해지게 된 역사는 다음과 같다.
그땐 한참 어벤저스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고작 해봐야 일 이년도 안 된 얘기다. 토르는 천둥을 쏘고 헐크는 힘이 넘치고 아이언맨은 에너지빔을, 스파이더맨은 거미줄을 쏘던 세상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친구가 자기도 히어로처럼 능력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마음대로 천둥도 쏘고, 아이언맨처럼 날아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실은 나도 히어로라고, 그렇지만 정체를 속이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숨어 사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자주 있는 무리수 드립이었다. 친구가 그럼 너는 무슨 능력을 가졌냐고 물었다. 나는 아주 깊이 고민하는 척하면서, 드디어 이걸 밝혀야 하나 싶은 표정과 함께, 수줍음과 긴장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실, 가장 먼저 비를 맞아"
내 재치에 스스로 감동한 나는 그 비밀 아닌 비밀을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고 다녔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친구들은 자기도 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 능력은 자기 거라며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니 어쩔 수 있는가. 나는 정말로 그걸 증명해야 했다. 왜 타이슨은 "누구든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내 주먹을 맛 보기 전까지는"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나도 타이슨처럼 "누구든 비를 먼저 맞는다고 주장한다, 내 옆에 있기 까지는"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니 비 예보가 있는 날은 내 공연 날이었다. 현관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오늘도 절대 첫 방울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남들보다 아주 예민해 있어야 한다. 밖에서는 하늘을 살핀다. 친구가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어도 집중을 못한다. 본격적으로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드디어 때가 된 건가"싶어서 경계를 강화한다. 비 내음과 함께 바람이 거칠어진다. 그리고 톡, 하고 빗 방울이 한 방울 떨어진다. 친구는 자기 얘기에 빠져 있느라 비를 발견하지 못한다. 먼저 소유권을 주장해야 한다. 친구 말을 잘라먹는다. 드디어 내 능력을 입증할 때다. 끝내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다. "어? 비 온다". 그때가 비로소 내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비를 맞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패배한 친구들은 "아니 나도 봤는데 말을 안 했을 뿐이야"라고 말하지만 그건 공허한 변명에 불과하다.
나는 "비를 먼저 맞는 능력"이 영감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비를 먼저 맞는 건, 거듭 말하지만 가장 그것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비가 아니더라도 어떤 것에 예민해져 있으면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떨어지는 빗방울을 기다리는 자세 그 자체가 바로 영감과 닮았단 말이다. 글쓰기로 예를 들겠다.
나는 글을 자주 쓰기로 다짐했다. 그러니 "오늘은 어떤 걸 써볼까"싶은 마음으로 주변을 살핀다. 마치 언제 물방울이 떨어질지 살피는 것처럼. "써야지" 싶은 생각은 계속 나와 함께다. 화장실을 가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도 뭘 쓰지를 고민한다. 마치 비가 오는 날에 옆 친구 대화에 집중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글감을 고민하면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동아리 후배를 만난다. 별로 안 친한 후배다. 지하철을 같이 탔는데 이 후배가 먼저 이어폰을 낀다. 그러자 대화를 파업한 후배가 섭섭하다. 그런데 섭섭하면서 동시에 마음속에서 쾌재를 부른다. 아, 이거다. 오늘은 이걸 글로 쓰자, 라며 생각이 든다. 그렇게 쓴 글이 "거절받을 용기"다
https://brunch.co.kr/@jooho201/38
베네치아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민박 스텝의 일과를 매일매일 기록하던 중이었다. "오늘은 뭘 쓰지"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식탁에서 일기를 적던 중에 한 신혼부부와 같이 저녁을 먹게 됐다. 밥이 술이 되고, 공적인 이야기가 사적인 이야기가 되면서 남편은 나에게 훈수를 시작한다. 불편하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쾌재를 외친다. “계속 얘기해봐라, 나는 글로 복수할 거다”라는 마음을 갖는다. 남편이 자러 간 뒤에 적었던 일기를 지우고 대화를 복기한다. 그렇게 쓴 글이 "위대한 게스트"다. 필패하는 자소서에서 공항철도 문항으로 기록돼 있다.
https://brunch.co.kr/@jooho201/65
나는 실제로 가장 먼저 비를 맞는 사람이라기 보단, 비에 가장 예민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예민한 태도”자체가 “영감”이랑 닮았다고 생각한다. 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무작위 하지만 그걸 먼저 보려는 태도로 “어? 비 온다”를 말하는 능력을 갖는 것처럼, 어떤 것에 몰입하면 지나가는 모든 일상이 영감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어떤 것에 예민해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버스 하나 지나가는 모습에서도, 광고 기획안에 몰입한 사람은 버스 밖 광고를 보고, 노동권에 예민한 사람은 기사의 근로 조건을 곱씹으며, 타이어에 관심 있는 사람은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지를 볼 테다. 마치 내가 "오늘은 어떤 걸 쓰지"싶은 상태로 주변을 살펴보는 것처럼.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에 예민해 있는가. 어떤 것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가. 만약 버스 한 대가 지나간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조명할 건가. 나부터 말하자면, 실속 없어 미안하지만, 환승 여부 먼저 고심할 것 같다. 가난한 취준생이라 대단한 걸 떠올리지 못해 미안하다.
아무쪼록 이 글을 통해서 앞으로 "비를 먼저 맞는 능력"이 더 심한 견제를 받을까 걱정된다. 앞으로 경계를 더 강화해야겠다. 사실 나는 다른 특기사항이 하나 더 있다. 사람이 많은 버스정류장에서도 꼭 그 버스가 내 앞에 서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건 언젠가 다른 곳에서 밝히기로 하겠다.
그런데 이 두 개의 특기사항은 현대에서 요구하는 능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현대는 또 이렇게 인재 한 명을 놓치게 됐다. [3,979자]
“필패하는 자소서”에선 자소서 문항을 제 맘대로 대답하는 형식의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진로 고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 부끄러움, 대인 관계 등이 키워드입니다. 기획 의도가 담겨있는 프롤로그를 첨부합니다. 팔로우를 하시면 글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https://brunch.co.kr/@jooho20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