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실격 Feb 26. 2020

본인의 도덕성을 나타낼 수 있는 경험을 기술하시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사업운영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사업운영직

본인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나타낼 수 있는 경험이나 사례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 [500자]


나는 내 우산을 훔쳤다.


사연은 이렇다. 그 날은 강수 확률이 30%였다. 비가 와도 30%는 맞춘 셈이고, 안 와도 70%는 맞추는 그 확률은 너무 애매해서, 우산을 챙기는 건 전적으로 본인 몫이라고 책임 전가하는 것 같았다. 40%이었으면 고민 없이 우산을 챙겼을 텐데.  

 현관에서 갈등하다 결국 빈손으로 집을 나섰다. 혹시 비가 안 오기라도 하면 긴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게 아주 번거롭기 때문이다. 약한 비라면 모자를 뒤집어쓰는 걸로 해결할 수 있다.


번거로움 말고도 되도록이면 우산을 안 챙기려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건 내가 우산을 자주 잃어버려서다. 집에 잃어버린 우산을 대체하기 위해 산 3,000원짜리 비닐우산이 다섯 개도 넘는다. 그 투명한 우산이 꼭 내 미련함의 증거 같아서 살 때마다 그 금액만큼의 자괴감이 들었다.

 다른 거, 예를 들어 지갑이나 핸드폰은 만취 상태에서도 잘 챙긴다. 그런데 유난히 우산은 맨정신에도 쉽게 흘린다. 버스에서 옆 자리에 잠시 우산을 세워 둔 뒤에 혼자 하차한 날도 많았다.

 예수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지만, 멍청한 내 두 손은 서로 책임을 묻다가 자주 우산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현관에서 "우산을 안 챙겨도 되는" 여러 이유를 신속하게 계산한 뒤 결국 빈 손으로 등교했다. 나는 70%에 운을 걸었다.


그렇게 비가 안 왔다면 이 문항은 비워져 있겠지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다"던 가사처럼 강의실 밖으로 먹구름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선 이내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졌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강의는 2/3 지점이었고 아직 비는 거세지 않았다. 만약 교수님이 지금 끝내면 버스정류장까진 충분히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야속한 교수님은 강의를 풀로 채워서 하셨고, 심지어 몇 분 더 넘기는 바람에 비가 거세질 시간을 벌어줬다. 아아, 교수님은 우산을 챙겨 오셨나 보다. 다 마칠 때쯤엔 바깥에선 장댓비가 쏟아졌다.


일단 가방을 챙겨서 동아리 방으로 향했다. 바로 옆 건물이기도 지만 동방은 학교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편한 공간이기도 했다. 이게 4학년이 됐다는 증거일까. 아무튼 비는 이미 너무 거세서 우산 없이 집에 갈 수 없었다. 동방에서 못한 과제나 하면서 비가 약해지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모자를 뒤집어쓴 채 동방으로 뛰어갔다.    


시끌벅쩍한 걸 기대하면서 동방 문을 열었지만 예상외로 아무도 없었다. 금요일이었다. 한 주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을 공강으로 만드는 학생이 많아, 학교엔 사람이 적다. 궂은 날씨도 그 고요함에 한 몫 했다.

 텅 비어 있는 동방은 오랜만이었다. 비 분위기와 적절한 노래를 틀고 노트북을 열어 과제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났고 결국 과제를 제출할 때까지 아무도 동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저녁이었다. 이제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

 바깥엔 아직도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몇 시간은 더 내릴 비 같았다. 이게 다 30%의 확률을 무시한 내 업보다. "앞으론 20%만 돼도 우산을 챙겨야지"다짐하면서 동방 문을 여는 바로 그 순간, 문 뒤에서 벽에 기대고 있는 우산 한 개를 발견했다. 아, 아직 신은 나를 완전히 버리진 않았다.


처음엔 그냥 가지고 가려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우산을 잡았는데 그립감이 아주 훌륭했다. 더 유심히 살펴보니 우산은 새 거였고 비싸 보였다.

 검은색 장우산이었다. 손잡이는 스펀지로 돼 있었고 잡기 쉽게 손마디에 맞춰서 파여 있었다. 그래 봤자 우산 주제에 힘도 좋았다. 피는 버튼을 누르자 아주 좋은 힘으로 밀고 나가서 "팡"하고 펴졌다. 뼈마디도 튼튼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골프장에서 캐디가 들고 다니는 우산 같았다. 아니면 비서가 자신은 다 젖으면서도 사장님을 씌워주는 그런 종류의 고-급 우산이었다.


만약 우산이 낡고 오래됐다면 내 결정이 더 신속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쓸데없이 고퀄리티였던 점은 나를 잠시 망설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내 물건이 아닌 것에 손을 대면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게 갑자기 비가 온다고, 게다가 하필 거기에 우산이 있다 해도 예외가 될 순 없다. 이 우산은 내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마음대로 가져가서도 안 된다. 어쩌면 야간 수업을 듣는 학생 것일 수도 있다. 잠시 우산을 동방에 두고 수업에 다녀왔는데 우산이 없어져 있으면 황당할 거다. 교양인이라면 주인 허락 없이 맘대로 우산을 가져가면 안 된다.


그렇게 동방 문 앞에 서서 이런저런 "우산을 가져가면 안 되는 당위"를 20개쯤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그 우산을 가지고 나갔다. 그것은 직관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차피 나는 우산이 필요했다. 거기서 오래 서 고민해봤자 내 양심만 아파올 뿐이다. 나는 뽀송뽀송하고 싶었다. 도덕성과 윤리의식은 비가 온다고 젖지 않는다. 젖는 건 무형의 양심이 아니라 유형의 신체다. 도덕성과 윤리의식도 일단 내가 상쾌한 뒤에 고려할 일이다. 결정적으로 금요일 저녁까지 방치돼 있다면 분명 누군가 까먹고 안 가져 간 우산인 게 틀림없다.


"동아리 좋은 게 뭐겠나, 다 이럴 때 대비해서 동아리 활동하는 거 아니겠는가, 비 오는 날 우산 하나 못 빌려 쓰면 그거야 말로 정 없는 동아리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힘센 우산 버튼을 눌렀다. 우산은 "팡"하고 퍼졌다. 그 소리가 커서 우산 주인에게 까지 들릴 거 같았다. 너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말자. 어차피 내일 쓰고 가져다 두면 된다.


그렇게 나는 뽀송뽀송하게 집에 도착했고 다음 날 아침에 우산 주인을 현관에서 만났다.


비는 밤새도록 내렸고, 다음 날에도 그치지 않았다. 외출하기 위해 현관에서 우산을 챙기던 아버지가 "이 우산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거냐"라고 물은 거다. 그 우산은 아버지가 지인 결혼식에서 받아온 우산이었다. 몇 번 쓰지도 않고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니 상태도, 퀄리티도 좋았던 거다.


우산을 잃어버린 것도 나였고 다시 찾은 것도 나였다. 비 오는 어느 날에 내가 그 우산을 갖고 학교에 갔고, 자주 그렇듯 동방에 두고 왔다. 착한 우리 동아리원은 비 오는 날에도 그 우산을 탐내지 않았기에 우산은 오랫동안 동방에 있을 수 있었고, 흑심 가득한 내가 비 오는 날에 그 우산을 훔쳐서 집까지 쓰고 온 거였다. 그러니 결국 내가, 내 우산을 훔친 셈이다.

 언젠가 비슷한 민망함을 느껴 본 것 같다. 텅 빈 도로에서 무단횡단을 다짐하며 건너는 바로 그때에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게 되는 순간에.


"본인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나타내는 경험"을 묻는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이 에피소드를 어떻게 봐줄까. 무단횡단을 다짐하고 건넜는데, 그 순간 초록불이 됐다면 이건 무단횡단인가 아닌가. 우산을 훔치긴 했지만 그게 내 우산이면 이건 훔친 건가 안 훔친 건가.

 아 모르겠다. 뽑는 사람이 알아서 판단해주겠지. 그러니 일단 뽑아줘라. 내 앞으론 최소한 20%만 돼도 우산 잘 챙기겠다고 약속 하마. [3,392자]


매거진 “필패하는 자소서”에선 자소서 문항을 제 맘대로 대답하는 형식의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진로 고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 부끄러움, 대인 관계 등이 키워드입니다. 기획 의도가 담겨있는 프롤로그를 첨부합니다. 매거진을 구독하면 글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https://brunch.co.kr/@jooho201/47


이전 15화 본인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세 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