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ink Glove
Jul 15. 2019
우선 살부터 빼고 오겠습니다
1-5 나의 덤플링
Netflix로 본 영화 '덤플링'에서는 누가보아도 고도비만인 10대 소녀 윌로딘이 미인 대회 출신 엄마(제니퍼 애니스턴)에 대한 반발심으로 엄마가 감독으로 진행되는 미인대회에 참가한다. '미녀는 괴로워'처럼 몇 씬만에 미녀로 변신하지 않아도 사랑받는 주인공과 그 친구들. 현실에서도 이런 내가 뷰티 퀸이 되는게 가능한 일일까.
현실의 뷰티 퀸은 못되어도, 영화처럼 잘생긴 남자에게 밑도끝도 없는 키스와 고백은 못 받더라고 예전처럼 M을 꼭붙게 입는 수준만 되어도 행복할 텐데. 옷쇼핑은 우선 참기로 했다. 큰 옷을 사입다보니 점점 살이 더 찌게되는 것 같아서 지금 있는 옷들 중 그나마 맞는 것들로 버텨 보리라. 그리고 살이 빠지면 신상 옷을 사입고 뉴욕에 가야지. 벌써 일주일이 거의 다 지나고 주말이 되었다. 느지막히 일어나서 코스트코를 다녀왔다. 요즘 더운 날씨 탓에 물을 많이 마셔서 집에 마실 물이 똑 떨어졌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맛없는 수돗물은 못 마시니 500 미리짜리 병으로 넉넉하게 사다놓아야 한다. 간 김에 눈에 들어온 초록병 Perrier 탄산수도 카트에 담았다. 콜라,스프라이트는 이제 끊고 대신 탄산수를 마셔야지. 탄수화물과 먹는 음료수들은 그대로 지방이 된다던데. 코스트코까지 간김에 한밤중 간식을 대신할 견과류와 체리도 사서 쟁여놓았다. 계산대를 지나자 특대 사이즈 피자와 대형 핫도그가 판매대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겨 먹고싶었지만 꾹 참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뿌듯하다. 보기만 해도 건강해 질 것같은 이 아이템들. 문득 1주일동안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이정도면 빠졌겠지 싶어 냉장고 옆에 둔 체중계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보았다. 1파운드가 빠졌다. 기운이 쭉 빠진다. 겨우 1파운드? 아직 점심먹기 전이니 점심을 먹고나면 이 1파운드도 다시 올라갈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까 그 맛있는 핫도그나 양파랑 피클 잔뜩 얹어서 먹고 올걸.
하지만 내 스스로도 알고는 있었다. 몇번 찌고빠지고 요요가 오고나서 내 몸무게는 웬만큼 독한 다이어트를 하지않고서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맥이 빠진다. 주사라도 맞아야 하나, 다이어트 센터라도 찾아가볼까. 요새는 비만도 질병으로 분류해서 보험처리 해준다던데.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던 찰나, 회사 친구가 얘기해준 사우나가 생각났다. 서양식 사우나인데 다녀오고나면 붓기가 쏙 빠진다 던데. 우선 사우나부터 좀 다녀와볼까. 수분이든 독소든 뭐라도 우선 좀 빼보자.
부처상에 미니 대나무. 왜 미국인들은 이런 컨셉을 릭랙스된다며 좋아할까. 향긋한 허브향이 나는 프런트 데스크에는 아시아 컨셉의 데코레이션과 사뭇 대조되는 금발머리의 상냥한 직원이 앉아있었다.
'I have a reservation at 5.'
라고 하자, 이름을 묻고는 친절하게 내부를 보여주며 설명해 준다. 가운을 입고 1인실 사이즈의 나무 사이나에 들어가 있으니 땀이 나기 시작한다. 이렇게까지 땀이 많이 나기는 오랫만이다. 속옷도 벗고 가운을 입을걸. 괜히 그 위로 가운을 입었더니 벌써 축축하게 젖었다. 갈아입을 옷도 안 챙겨왔는데. 다음엔 안에 수영복을 입고 와볼까. 35분 간의 뜨거운 사우나가 끝나니 옆방으로 이동해 냉기 가득한 냉탕이 있다. 뒷골이 쭈뼛할 정도의 냉기. 그 안에서 10분을 못버티고 나왔다. 그렇게 사우나를 마치고 나오자 몸이 상쾌하다. 왠지 피부도 탱탱해진 것 같아. 가끔 들러야겠다. 가격은 좀 착하지 않았지만, 한국같았으면 사우나를 이 반값에 갈 수 있었겠지만 이 미국동네에서는 이정도 수준의 사우나를 경험 할 수 있다는게 어디냐 싶었다. 이렇게 사우나를 끝내고오니 갑자기 관리를 하고 싶어져 평소에 잘 하지도 않던 시트팩도 해주고, 발에 디톡스 시트도 붙여주고, 라벤더 향의 초도 켜두었다. 마음이 좋아진다. 아 이대로 잠이 들면 되려나...싶은 찰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짜증이 팍 난다. 아파트 수리하는 사람인가. 나의 이 여유로운 주말을 방해하다니. 짜증이 팍 난 상태로 확인도 안하고 문을 열었다.
키 큰 아시안 남자가 문 앞에 서있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어쩌자고 혼자사는 여자가 확인도 안하고 문을 열었을까. 게다가 아무리 안에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었어도 가운을 걸친 채.
'um...sorry...I thought this is my new apartment. Are you my roommate?'
당황한 내 표정만큼이나 그 남자의 표정도 당혹스러워 보였다. 다행히 핸드폰은 내 손에 쥐여진 상태다. 더듬더듬 얘기를 하는데 영어에 강한 한국어 악센트가 있다.
'한국분 이세요?'
'아!!!네 한국사람이예요. 저 이 방이 제가 이사오는 아파트로 알고있어서... 짐 좀 미리 옮기려고 왔는데...룸메이트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 제가 여기 사는 사람인데요. 전 룸메이트가 없어요. 호수를 잘 못 아신거 아닐까요? 몇호신데요?'
'아...311호요.'
' 그럼 저 맞은편 이예요. 여기는 312호 예요.'
' 아 그래요. 죄송하게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이 든 상자를 다시 들고는 맞은편 호수로 걸어간다.
처음에는 공포심에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름 하얀 얼굴에 큰 키에 단정한 옷차림이 보기 좋은 남자였던 것 같다. 이 동네에서 한국사람 보기 힘든데 조금 반갑게도 느껴졌다. 뭐. 또 기회가 생기면 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