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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k Glove Jul 16. 2019

우선 살부터 빼고 오겠습니다

2-3 그 해 여름

선호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티격태격 말 많은 한인 학생회을 안정적으로 리드했고, 후배들에게는 귀중한 족보인 본인 시험지를 차곡차곡 정리해 나누어 주었고, 여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지않는 남사친 이었다. 키도 컸고, 수영으로 다져진 어깨는 넓었고, 오뚝한 콧날과 달리 눈꼬리에 주름잡히며 웃는 눈은 귀여웠다.

선호가 3학년을 마치고 반년간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간다며 송별회 겸 모인 마지막 날, 술에 취해 울며 취중고백을 한 여학생이 둘이나 되었던 것은 우리 사이에 대학 전설로 전해졌다. 사실 우리 동기 중에 선호를 좋아하지 않았던 여학생이 몇이나 될까.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잘 지냈어?'

엄청 무더웠던 그 여름날, 텅 빈 도서관에서 계절학기 수업에 낼 레포트를 혼자 열심히 쓰고 있는데 선호가 홀연히 나타났다.

'어? 돌아왔어?'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응. 엊그제 미국으로 돌아왔어. 오니까 아무도 없네. 일본에 가는 바람에 연락처도 다 잃어버리고. 하하. 다들 졸업했을려나?'

'응...졸업한 애도 있고, 남아있는 애도 있고...'

' 그래? 그럼 너 연락처 좀 알려줄래? 애들도 모아서 한번 보자.'

선호가 폰을 건네며 방싯 웃었다. 저 놈의 보조개. 저 보조개가 사람 마음을 톡톡 간질인다.


그게 인연이었을까. 선호랑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여름 학기 수업을 듣느라 지겨워진 나에게 선호는 한줄기 빛 같았다. 텅 빈 도서관에 혼자 앉아있는 선호를 발견하면,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시선을 느낀 선호가 고개를 들고, 같이 앉자며 테이블을 톡톡치면 심장에 탄산수를 부은것 마냥 간질거렸다.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어느새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호프먼 수업 들었어? 파이널이 전체 성적에 40퍼센트래.'

'아 나도 다음학기에 그 수업 들어야 하는데. 두렵다.'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엔지니어링 전공이라 공통으로 들어야할 수업들이 꽤 있었다. 수업 얘기도 하고 새로 지은 학교 카페테리아 메뉴 얘기도 하다 어느새 학교 앞 버거킹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고, 더운 날은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갔고, 어느 순간 주말에 만나 스타벅스에서 커피같이 마셨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앞으로 선호가 날 데릴러 오기도 하고, 내가 선호를 데릴러 가기도 했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그해 여름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있었다.


여름이 지나고 학생들이 가을 학기를 들으러 학교에 돌아오자, 선호는 인기인답게 여기저기서 찾았다. 그 와중에 틈틈히 선호는

'이번 주에 같이 점심먹자.'

'토요일에 커피하자.'

같은 문자들을 보내주어, 나는 비밀연애를 하는 것 마냥 설렜다.

선호를 가끔 캠퍼스에서 마주치면, 선호 옆에 다른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그래도 선호가 나를 특별히 소중한 친구로 생각해 준다고, 무의식 중에 그렇게 믿었다.


선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집 근처 걷기부터 시작을 했다. 얼른 예뻐지고 싶은 마음에 밤이고 낮이고 시간이 나는대로 걸었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던 그날 밤, 나는 또다시 나가서 걷기 시작했고, 무의식 중에 내 발걸음은 선호네 아파트 쪽으로 향했다. 이어폰을 꽂고 정처없이 걷고 있는데 익숙한 차가 옆을 지나갔다. 분명 선호의 파란 소나타 였다. 순간 너무 반가워 인사를 하려고 다가가니, 조수석에서 다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종아리까지 내려온 단정한 치마. 어둠 속에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키가 작고 마른, 소녀스러운 동행자가 선호의 아파트로 선호와 들어갔다.

선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 뭐해?'

답변이 없다.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답변이 없다.

그순간 깨달았다. 나는 선호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 늦은 밤에 꿀떨어지는 비밀문자를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다. 선호는 그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던 거다. 나에게도, 진호에게도, 선호에게 눈독들이는 에이미 나 다른 여자애들에게도, 선호는 원체 그런 사람이었던거다.

그 날 나 혼자만의 실연은 나만의 말못할 비밀이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선호가 도쿄에서 온 예쁜 일본인 미소녀와 썸을 탄다는 소문이 한인 학생들 사이에 퍼졌고, 그 기대를 충족이라도 시켜주듯이 선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걸어다녔다. 그 잔상은 두고두고 내 머릿 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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